▲김영호 목원대 미술대학 교수 |
- 고은 시, 그 꽃
맑고 높은 하늘빛에서 가을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얼마 전 청명한 가을볕을 만끽하기 위해 가까운 계룡산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쾌적한 가을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시면서. 모처럼 몸도 마음도 가벼운 산행 길에 불현듯 고은 선생의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 떠올랐다. 실은 매번 산행할 때마다 그 짧은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올바른 감상이 될지 머리를 싸맨 지 오래였던 것 같다.
꽃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거늘 산에 오를 때는 왜 못 보았을까. 오를 때 지나친 꽃이 내려올 땐 보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간결하기 그지없고, 난해한 시어(詩語)도 없는 짧은 시(詩) 아닌가. 그럼에도 단순한 체험기를 넘어서는 뜻 깊은 의미를 헤아려보라는 시로 남겼다. 선문답(禪問答)의 경지는 아닌지 두고두고 그 의미를 캐느라 속 꽤나 썩힌 아둔함이 야속할 따름이다. 정교하게 압축된 언어로 우주를 품기도 하고, 세상의 진리를 꿰뚫기도 하는 지혜의 정수(精髓)를 드러내는 것이 시(詩)라던가.
'그 꽃'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신체의 한계를 느끼게 했던 다소 무리한 산행 길에서였다.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게다가 정상에 이르는 길은 까마득하고 험난하여, 좀처럼 아름다운 풍광이며 어느 것 하나 여유롭게 감상할 겨를이 없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기기에 급급한 오르막길이다. 그 와중에 한가로이 꽃을 보기란 쉽지 않을 터다.
어렵사리 산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성취감은 그간의 수고를 일순간에 날려 보낸다. 발아래 펼쳐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음미할 즈음에는 남모를 뿌듯함에 쾌재가 절로 인다. 높이 오를수록 널리 보인다는 갈매기 조나단의 처절한 비상(飛上)에 박수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상에 오른 자만이 깨우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어느덧 한껏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고 내려가야 할 때다. 어렵게 정상을 밟았던 만큼 내려가는 길엔 여유롭게 풍광을 즐기며 발걸음을 옮기리라 여유를 부려본다. 내려갈 때 보았다는 시인의 그 꽃을 확인해보리라 마음을 다지면서. 그도 잠시, 내리막길은 “세상은 결코 맘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일깨운다. 잠시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을뿐더러 자칫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인 내리막길에서 그 꽃을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사그라진다.
그렇다면 시인이 보았다는 꽃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산에 오를 땐 숨이 벅차고 육신이 고단하여 쉽지 않다. 내려오는 길엔 오를 때와 비교 못 할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여유부리기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그 와중에 유유자적 꽃을 감상해보라 권유(?)하는 시인의 속뜻을 어떻게 해석할지 난감하다. 오묘한 시세계(詩世界)의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다. 시인은 매사에 쫓기듯 허겁지겁 바삐 움직이는 현대인의 삭막한 삶에서 산에 오르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렸던 것 같다. 나아가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돌진을 외치며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는 현대인의 부질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부작용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쉼표로 '그 꽃'을 살포시 권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과정에서 앞뒤 가눌 짬이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 아니던가. 시인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그 과정을 오롯이 존중해 준다.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 꽃'을 보았다는 회한서린 고백으로, 시세계의 역설로 세상을 흔들어 깨운다. 목표한 바를 이루면 모든 걸 내려놓고 평정심을 복원시켜 폭넓게 세상을 고요히 살피는 여유를 찾으라는 역설에서 그 꽃의 참 뜻을 구해본다.
다시 현실을 둘러보자. 넘쳐도 모자랄 만큼 많은 것을 이룬 자들의 부작용에 대한 추태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끝을 보여주려는 듯, 더 채우려다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최고의 지위에 오른 정치인들, 기관장들, 그 외에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그 꽃'을 바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