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 건양대 총장 |
그러나 미행정부와 의회의 움직임은 미진했다. 9ㆍ11 이후 5개월간 행정부는 물론 의회 역시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는 커녕 어떤 조사위원회도 구성하지 않았다.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철저하게 무시됐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마당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가동하는 것은 전쟁 중 내분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게 여당인 공화당 주장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결국 진상을 밝혀낸 것은 사실상 '9ㆍ11 진상조사위원회' 덕분이었다. 그러나 테러 발생 직후 이 위원회가 생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유가족들은 “정치적이며 과격하고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ㆍ여당의 반대를 이겨 내고 조사위가 출범할 수 있었던 건 희생자 유가족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12명 유가족으로 구성된 '9ㆍ11 독립위원회를 위한 가족운영위원회'가 미국민의 여론을 움직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론이 반전된 것은 부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남편을 잃고 유가족 대표를 맡은 크리스틴 브릿와이저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였다.
“우리 활동이 대부분 시민들처럼 투표소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치인들이 독립적 위원회를 설립해서 테러 공격을 조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9ㆍ11 테러로 남편을 잃은 우리들은 아이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겠지요. 너무 지치고 겁도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왜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이들에게 말해줘야 하고, 그들이 더 안전한 미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죠.”
여론이 들끓자 부시 대통령은 테러 발생 14개월 뒤인 2002년 11월27일 '위원장은 내가 지명한다'는 조건을 달고 조사위 설립에 동의했다. 이 위원회는 범국가적, 초당적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추천한 10명 위원으로 꾸려졌고, 직원 80명이 별도로 고용돼 실제 조사를 담당했다. 기밀정보 사용 허가를 받은 직원들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정보기관 부국장, 주 법무장관, 하버드대 역사학교수, 국가간 자금 이동관련 전문가와 연방 검사 등이 포진했다. 위원회는 조사 기간 중 10개국에서 12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국가안보 문서 등 관련 자료 250만 페이지를 검토했고, 총 12차례(19일)의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의 첫 증인은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이었고 이후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고위 공무원이 증언석에 앉았다. 대통령 등 일부 인사의 증언은 비공개로 처리됐지만 공식 사이트에는 속기록과 녹취 파일, 보고서 등이 낱낱이 게재됐다. 조사 결과는 1년 8개월 뒤인 2004년 7월 최종보고서 형태로 공개됐다. 테러 원인으로 위원회가 내린 최종 결론은 '상상력의 실패'였다. 테러 공격 위험이 높아지는데 정부가 더 큰 공격이 있을 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정부가 해야 할 41가지 권고 사항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질 국토안보부가 설립되고 이제 미국은 누구로부터도 공격받지 않을 탄탄한 국토방위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차가운 한 길가에 앉아 눈물의 추석을 보냈다. 온국민들도 가장 불편한 추석을 보냈다. 물론 미국 9ㆍ11 사건은 테러라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사건이 안겨준 충격과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하루빨리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 국민의 저력을 다시한번 세계에 보여 실추된 국격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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