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목원대 미술대학 교수 |
몸이 불편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불편한 몸으로 학업을 잘 마칠 수 있을지, 학우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대학에 진학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는 것은 아닐지 착잡한 심정으로 첫 대면을 마쳤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어린 시절 적지 않은 이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장애우를 처우했던 것을 본적이 있다. 그런 불편한 기억이 떠올라 장애우 학생에 대한 시름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후 첫 수업시간에서였다. 남과 다른 학우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 친구는 몸이 불편하니 잘 도와주길 부탁할게.” 돌이켜보면 좀 더 진지하고, 세련된 어조로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어야했는데, 너무나 단편적으로 얘기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을 목격하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지켜보니 남학생 서넛이 돌아가며 친형제처럼 돕는 것이 아닌가. 이동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부축하기도 하고, 나아가 등에 업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지켜볼 때에는 실로 감동 그 이상이었다. '잘 돌봐주라' 부탁은 했지만, 어떨지 반신반의했던 필자의 우려를 보기 좋게 불식시킨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며 그 친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한 도움 받는 것에 감사할 줄 알고, 가능한 한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안간힘을 쓰며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교직자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에도 잘 극복하며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좋은 바이러스의 전파력에 놀랄 따름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후학들의 선행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들뜬 기분으로 여행길에 올라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스러진 어린 학생들. 나라를 지킨다는 의무감으로 전선을 지키다 비뚤어진 병영문화의 희생자가 된 우리의 자식들이 부지기수다.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이보다 쓰라리게 하는 일도 없을 터다. 이제 너나없이 냉철하게 스스로를 돌이킬 때다.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사건의 배경에는 잘못된 인성교육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깊은 반성이 요구되기에 그렇다. 이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부모들은 아이들이 집밖에 나설 때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타이른다. 미국에서는 “남을 잘 도와줘라”며 밖에 내보낸다 한다. 두 나라 공통적으로 자식들에게 이타적인 인성을 교육시킨다. 이처럼 남을 배려하고, 도와줘라 격려하며 인성교육의 해법을 내놓는다. 기본적인 인성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좋은 예다.
우리는 어떠한가? 아름답게 사는 법보다 경쟁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방법만을 강요하진 않았는지. 남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모색하기보다, 균형 잃은 욕심으로 최고만을 고집하며 막다른 곳으로 내몰지는 않았는지. 올바른 인성교육에 대한 성찰이 절실한 요즈음이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되면 만사형통'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의 폐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파멸시키는 예가 곳곳에서 입증된다. 그저 '내 자식만 잘 되면'하는 헛된 바람이 초래한 결과가 오늘날 우리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최고반열에 오른 지도자들의 인성을 의심케 하는 일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뭔가 낫겠지' 하는 기대심리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며 회복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증폭시키며 사회를 그늘지게 한다. 그래도 절망하기는 이르다. 아직은 미래를 기대해도 좋을 수많은 아름다운 청춘들이 주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래, 걱정 마! 네 곁엔 우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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