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석 수필가 |
오로지 나만 양심이고, 정의라고 고집하는 집단들의 귀결점은 7ㆍ30보궐선거가 증거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국가권력을 거머쥐고 싶은 욕심흉계는 결국 국민의 양심과 정의 앞에 참패를 당했다. 정치란 오로지 국민들의 심판으로 검증된 양심이고 정의여야 한다.
지난날 '단일화' 미명으로, 국가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종북 내란음모집단을 국정단상으로 끌어들인 정치세력들이 국민의식 속에 양심과 정의로 합리화될 수가 없다. 거짓말 폭로로 직장의 윤리기강마저 무시한 채 직속상사의 목을 치고, 옷을 벗기는 공직자들의 하극상풍토를 조장하는 게 “시대의 양심이 되고 정의”가 될 수도 없다.
또 축첩하고 혼외아들까지 숨겨두었던 비윤리적 공직자를 “파도파도 미담 뿐”이라고 거짓말하며 검찰총수 자리에 앉히려 했던 국회 청문회의 교활한 정치풍토 또한 양심이 되고 정의가 될 수도 없다. 참사발생 몇 달간 잠적했던 주범검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가, 유병언이 죽음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특별법시비에 큰소리치는 행태가 정치적양심이고 정의가 될 수도 없다.
양심과 정의가 어쩌다 이 꼴로 비운을 맞게 되었는가. “이로운 것을 보면, 의리부터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는 이제 한낱 사자성어일 뿐이다. 수양 없는 양심이나. 성찰 없는 정의는 자칫 주관 잃은 망상이거나, 정치적 선전선동 수단에 불과하다. 또 검증되지 않은 양심과 정의는 자칫 '범죄'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내란음모집단들의 단죄를 선처해달라는 종교단체의 탄원도 국민적 양심과 정의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빌미삼아 유족들의 애끓는 비통에 편승해서 정치적 선전선동수단으로 이용해온 일부 정치집단의 행태 역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양심과 정의에 대한 모독이고, 순진무구하게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모독이며, 선량한 유족들의 양심과 정의를 짓밟는 정치폭력이 아닐 수 없다.
양심과 정의가 짓밟힌 피해는 모두 죄 없는 국민들 몫이 되고 있다. 당쟁으로 나라를 망친 이조(李朝)역사는 이제 거론하는 것조차도 저주스럽다. 목숨 바친 호국선열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일제식민치하에서 나라를 찾았고, 포탄 속에 뛰어들었던 애국충혼들의 양심과 정의가 있었기에 6ㆍ25남침전쟁에서 오늘의 나라를 지켰다. 또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기성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문명과 풍요도 일구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역사나,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낸 6ㆍ25전쟁역사가 이제 겨우 반세기에 불과하다. 등 따습고 배불러진 정치가 선대들이 양심과 정의로 세워놓은 과거역사를 짓밟고 있다.
아직도 불우한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애국선열들의 후손들이나, 6ㆍ25남침전쟁 후유증으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는 호국무공수훈자들이 공존하고 있지만, 대부분 정치통치의 무관심과 홀대 속에서 우울한 생존의 말년을 지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 특별법제정을 둘러싸고 야당이 제시한 내용들에 국민이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다.
며칠 후면 69주년 광복절이다. 음흉한 야욕달성을 위해 불행한 슬픔마저 정쟁수단으로 이용해온 선동정쟁은 이제 끝내야 한다. 양심과 정의가 정치적 선전선동수단으로 변질돼서도 안 된다. 7ㆍ30재보궐선거결과는 정치인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이젠 양심과 정의가 새 빛을 찾는 새 역사를 써야한다. 국민의 양심과 정의는 우매하지도 않고 음흉하지도 않다. 잘하면 야당도 여당 되고, 잘못하면 여당도 야당 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심판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국민의 권리다. 어느 정치가 썩은 양심, 죽은 정의를 되살려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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