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단상]배운 것을 잊은 후에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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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단상]배운 것을 잊은 후에 남는 것

이경옥 서산석림중 수석교사

  • 승인 2014-08-05 15:20
  • 신문게재 2014-08-06 16면
  • 이경옥 서산석림중 수석교사이경옥 서산석림중 수석교사
▲이경옥 서산석림중 수석교사
▲이경옥 서산석림중 수석교사
결혼하고도 종종 찾아오던 제자 Y가 한동안 연락이 뜸하더니, '카톡' 문자가 왔다. 캐나다에서 취업했고, 아내와 아이들(쌍둥이)은 학교에 다닌단다. 반갑다. 하는 일은 퍼스털 트레이너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이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킥 복싱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킥 복싱과 태권도 유단자로서 대학에서 경호학과를 전공했는데, 적성을 잘 찾았다 싶다. Y는 내가 중3 담임을 맡은 제자인데 유독 기억에 남는 아이였다.

매일 아침 1시간씩 학교 주변을 청소했고, 또래보다 세 살 위라서 점심시간 마다 전교생 급식 질서를 지도하고 나서 맨 나중에 밥을 먹던 아이, 의협심에 불타 어디선가 한 판 붙었다는 후문이 가끔 들리기도 한 아이, 중국어를 썩 잘 했고, 도내 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할 만큼 노래도 수준급이던 아이, 자습 시간에 담임이 걸레질이라도 할라치면 한사코 그 걸레를 가져가 자기가 청소를 하던 깍듯하고 자주적인 아이….

이렇게 신실한 제자 Y는 당시 탈북 청소년이었다. 그는 14살 때 북한을 떠나 중국에 거주했고, 어린 시절 북한에서 공개 처형을 두 번이나 목격한 충격도 있다, 중국에서 사소한 싸움으로 공안에 걸려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었는데, 다행히 만 17세에서 몇 십 일 모자라 아오지 탄광 행을 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단다. 또 다시 그는 목숨 건 탈출로 중국의 부모와 재회하였지만, 배고픔만 면했지 불법 체류의 불안은 여전했다.

미국 선교사와의 미국행 계획마저 좌절되자, “세상에 태어나 불법 체류자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가다가 죽더라도 남조선으로 가겠습니다.” 중국의 부모님께 유언처럼 비장한 말을 남기고 제3국 몇 나라를 거쳐 홀로 이 땅을 찾은 십대 소년, 그가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되고, 해외에 진출하여 제 몫을 다한다니 참 대견하다. 반듯하게 커서 이 땅에 방황하는 수많은 탈북 청소년의 희망이 되리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감사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탈북 청소년으로서 Y처럼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그러면 제자 Y가 그런 역경에서도 그토록 열심히 살아간 힘은 무엇일까?

이 땅의 십대들이 진학과 진로를 위해 과도한 공부 스트레스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가족과의 기약 없는 생이별과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고통을 반복해서 겪었다. 그래도 그에겐 목표를 향한, 심장을 두드리는 꿈이 있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자유를 누리고 싶다! 더 배우고 싶다!' 나는 그 답을 그의 높은 정서적 공감력과 긍정적 사고에서 찾으려 한다.

“선생님, 그 동안 못난 놈 사람 만드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같으신 선생님을 만나 학교생활이 많이 즐겁고 행복했어요. 생각보다 남한 사회에 적응도 빨리 했구요.”

북한 말투가 섞인 씩씩한 어조로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뿐 아니라, 그를 애정 깊게 지켜보는 많은 선생님들도 그를 '감사하는 아이'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감사가 정서의 회복탄력성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최고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뒤에도 독서와 기도와 감사 일기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우리 교육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세계 최고의 학구열을 자랑하는 우리는 GDP 대비 사교육비 1위, 대학 진학률도 1위다. 그런데 청소년 관련 통계를 보면 OECD 국가 중 학생 공부 시간 1위지만 청소년 행복지수는 최하위, 문제해결력은 1위이나 끈기와 의지는 보통 이하, 청소년 자살 증가율은 2위다. OECD 중 PISA 점수도 수학 1위, 읽기 1~2위, 과학 2~4위 등 최고 수준의 지적 역량을 보이지만, 학습 동기나 흥미, 자신감 등 자아 관련 성취 지수는 OECD 평균 이하라니! 이것은 우리 교육이 뭔가 잘못 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다.

이처럼 인지적 성취 능력이 성공이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 교육도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오늘은 Y에게 답신을 해야겠다.

이 땅의 수많은 Y들이여, 너희의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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