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
이렇게 재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랑은 신부와 결혼할 권리와 그녀가 낳을 아이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가졌던 사회는 혼인으로 인한 경제적 거래를 하고 있던 사회의 44% 정도에 달할 만큼 흔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부대가는 그 액수가 적은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한 금액에 달했고 심지어는 신랑이 버는 연간 소득의 몇 곱절에다 3~5년에 걸친 신부봉사가 포함된 값비싼 신부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부대가를 치르는 것은 여자가 실질적으로 경제적 활동의 상당부분 역할을 한 농경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바로 여자를 데려옴으로서 신부 측 가족이 그만큼 경제적 손실이 생기게 되는데 그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부의 경제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의미도 있었는데 특히 아랍사회의 경우에 신부대가는 신부의 소유물이 되어 만약 이혼하게 되는 경우에 여자가 신부대가를 남자의 집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율법으로 정하여져 있어 이혼 후에도 독립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액의 신부대가는 남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이혼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억제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제도로서 신부봉사(bride service)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야곱 이야기에서 나온다. 야곱이 그의 처 라헬을 얻고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 동안이나 봉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부봉사제도인 것이다.
이것 역시 신부대가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는 혼인제도인데 앞서 본 것처럼 신부대가와 병행하여 신부봉사가 행하여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신부봉사가 행하여졌던 것은 신랑의 성격, 노동력 등 신랑의 역량을 시험하여 실제로 그의 처를 잘 부양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부봉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고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혼인제도의 하나로서 정착되어 있었다. '장가(丈家)간다'는 말은 바로 남자가 처갓집(장인집)에 가서 산다는 뜻이며 이른바 처가살이하는 남자를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학사상을 근간으로 사회제도로 바뀌었고 혼인제도 역시 변경되면서 중국의 혼례와 같이 혼인 후 곧 바로 신부가 신랑의 집에 들어와 살도록 하는 제도로 된 것이다. 결국 '장가간다'는 말이 '시집(媤집)간다'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신부봉사 외에 지참금(dowery)제도가 있다.
이것은 중세 서양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성행한 혼인제도로서 신부 측에서 상당한 재화나 재산을 신부나 신랑 또는 그 두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성행한 곳은 상당히 발전된 사회에서 보이는 현상으로 여성이 1차적 생계활동에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경우이다. 이처럼 여성이 1차적 생계활동을 하지 않을 경우에라도 장차 그 여성과 그녀가 가질 아이들에 대한 부양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계속)
법무법인 저스티스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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