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석 한국폴리텍Ⅳ대학장 |
프랑스가 재채기를 하면 유럽 전역에 몸살을 앓는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민중혁명은 유럽에 공포심과 혼란을 제공하는 진원지였다. 그러나 이 혁명의 파고를 넘어선 것이 영국 보수주의자의 개혁이었다. 대표적인 개혁 두 가지를 들자면 하나가 토리당(보수당의 애칭이며 1835년에 보수당으로 개명했다)의 로버트 필 총리가 주도한 곡물법 폐지였다.
당시의 곡물법은 지주와 농업인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가격을 밑돌 때까지 곡물 수입이 금지되었다. 곡물 문제는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물가폭등 등으로 제일 큰 정치적 이슈였다. 더욱이 산업혁명의 자식들인 공장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높은 가격의 빵을 구입하는 것이 커다란 불만이었다. 여기에 1845년 가을 아일랜드의 감자흉작이 필 총리의 정책결정을 바꾸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에 아일랜드에서 1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를 계기로 필 총리는 곡물수입 장벽만큼은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1845년 10월 1일과 23일, 로버트 필은 내각회의에서 곡물법 폐지를 제안했다. 그는 당내 보호주의자였던 몇몇 각료들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듬해인 1846년 1월부터 5월까지 다섯 번의 제안연설을 의회에서 했다. 1월 27일의 첫 연설은 무려 3시간 25분 동안 진행됐다. 이 개혁안에 토리당은 대다수가 반대한 반면, 야당인 자유당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때문에 필 수상은 정파를 초월하여 일을 추진했다. 결국 1846년 5월 15일에 자유당 의원 245명 가운데 235명, 소속정당인 토리당 356명 가운데 115명의 찬성으로 곡물법안을 힘겹게 통과시켰다. 이 법안 통과 이후 필 총리는 6월 29일 의회연설을 끝으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필 총리의 곡물법 폐지는 정파를 초월하여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응한 정책선택이었으며, 권력을 포기했다기보단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필 총리를 가리켜 '실각을 했을지라도 나라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는 디즈레일리 총리가 제2차 선거법 개정(1867년)을 통해 대중정당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산업혁명의 자식들인 노동자 계급에 투표권을 줘 토리당식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지주, 신흥 자본가 100만 명에게만 투표권이 있었으나 100만 명의 노동자가 추가됐다.
그는 전 계급을 망라하는 대동단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아래 부자와 노동자 두 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며 보수당이 국민정당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개혁은 당시 야당인 자유당이 해온 것 이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평가받았다. 15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평범한 결정일지 몰라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개혁의 여파로 토리당은 1874년까지 자유당에 정권을 내주었지만 신흥 상공업자 계층을 확보해 1874년부터 1906년까지 보수당 장기집권의 기반을 갖게 되었다.
보수는 진보처럼 특정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상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역사의 과정에 대한 존중, 안이한 문제해결에 대한 회의와 수구반동과 급진의 양극단으로 흐르지 않는 균형 있는 결정이 보수의 힘이다. 보수는 부여된 현실에 발을 딛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서 개량해 간다. '보존 없는 변화는 무(無)에서 무에 이른다'는 신념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는 혁명을 배격하고 개혁을 선택한다. 변화를 수용하는데도 유연하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개혁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혁명적 변화와 조건을 최소화한다. 적어도 영국의 보수를 본다면 그렇다.
7ㆍ30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한국의 보수도 질풍노도와도 같은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려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종 현안들, 즉 안전과 법을 무시하는 적당주의 제거, 세월호 수사에서 드러난 검경갈등의 해결, 병영문화의 개선, 서민 살리는 내수활성화 등 획을 긋는 개혁들을 품격과 균형 있게, 그리고 주도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