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표 대덕대 총장 |
오늘날의 교육을 대체로 경쟁을 부추기는 쪽과 그것을 덜어주려는 쪽의 마찰로 치부하기 일쑤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 폐지, 1973년 고교 평준화 정책 실시, 1980년 대학 본고사 폐지, 과외금지, 1995년 학력보다 개성존중의 5ㆍ31교육개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같이 정권차원에서 범정부적으로 펴낸 혁명적 정책이었으나 대체로 어떻게 하면 사교육 없이, 경쟁하지 않고, 인성과 개성존중의 교육을 펼 수 있을까 하는 거대 담론으로 50여 년간 흘러왔다. 따라서 교육을 정치적 또는 이념적 틀로 금을 그어놓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저 교육 자체가 있을 뿐이고 수요자인 학생들만 보여야 한다. 스며들어서는 안 될 정치적 이해 집단에 의해 채색되어지고 그들에 의해 왜곡되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되는 이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치무대화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교육에 대한 기회균등이나 정치적 중립도 기본법에 명료하게 천명하고 있으니 차제에 다 같이 살펴보고 되짚어 볼 일이다. 헌법 제31조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4항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라.
기회는 누구나 차별 받지 아니하고 균등하게 주는 것이 백번 옳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기회를 허용하는 평등교육에 매몰되어 과정적인 기회를 주는 것 자체를 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다. 뒤처진 학생을 위해 보조교사를 배치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공존을 위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수월성 교육은 있어야 한다.
일반고를 살리기 위한 대안이 자사고를 없애는 일이라거나 혁신학교가 정답일 수는 없다.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서울교육감도 자기 아들은 특목고에 보냈다. 변명치고는 참으로 옹색하다. 교육은 다양한 것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도 용기다.
진보든 보수든 한 지역의 교육수장이 합법적인 권한 내에서 특색 있는 차별화된 교육을 실시하고 제도화 하려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장려할 일이다. “경쟁 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경쟁과 부담을 줄여준다니 박수 칠 일이다. 그러나 교육에 관한한 왕도도 없고 전문가 아닌 사람도 없다. 따라서 많은 국민들은 “헌법 제31조 4항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치ㆍ이념 편향적인 교육을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단까지도 유리하면 박수치고 아니다 싶으면 학생들까지 팽개치고 집단행동에 나서는 초법적 행위를 언제까지 지켜만 보아야 하는가. 수업을 지장 없게 조치했다고 해서 조퇴가 당연시 될 수 없다. '참교육'을 표방할 때만 해도 신선하게 보았다.
교육은 기본법에 나와 있는 대로 정권이 바뀌거나 정치적 흐름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국가존속과 발전의 기본 정신이기에 진정한 진보라면 참교육으로 위장한 작금의 적폐들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 지역별 차별화된 교육으로 경쟁력을 담보하는 것이 답일 진데 담합을 해서야 되나. 17개 시ㆍ도 교육감들이 날밤을 새우는 한이 있어도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표로 당선되고 또 표를 계산할 일이 있어도 아닌 것은 아니다.
무리한 공약은 초기에 고하고 이해를 구하라. 스스로 발목 잡히지 말라는 말이다. 아무리 급식이 급해도 무너져가는 교실 그대로 둔 것도 모자라 마음 떠난 퇴직 희망자 붙들어 놓는 것은 교육행정이 아니다. 교육이기 때문에 보수건 진보건 정치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 완급을 가려 기본에 충실한 교육행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저 교육감이 있을 뿐이지 보수, 진보로 나누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