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나랏말씀의 숲'도 마찬가지여서 거친 말, 천한 말, 추한 말 속에 들면 메스껍고 답답하고 때로는 분노가 일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 곧 만성이 되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나 일본말이 전혀 없는 산골의 조그만 마을에서 자랐다. 한문을 배우다가 학교에 가서 일본말을 배웠다. 광복이 되자 '우리말 도로 찾기'에 열정을 쏟던 국어선생님한테 왜말과 우리말의 구별을 배웠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년의 머리에 박힌 '왜독 제거' 정신은 80이 넘어서도 시들지 않아 더러 주변의 핀잔을 받기도 한다.
'…오천 년 쌓아온 문화의 빛난 자취는 점점 벗어지고, 까다롭고 지저분한 왜국풍속에 물들인바 많아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으니, 더욱 말과 글에서 심하였다.…', '…우리말에 일어가 한 마디라도 남아 있는 동안에는 곧 일본 정신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시바삐 왜말을 씻어버리고 우리말을 살려야할 것이다….', '우리말 도로 찾기'의 머리에 적혀 있는 말이다.
광복 다음해인 46년 6월에 문교부(군정청) 편수국이 중심이 되어 각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분들로 '국어정화위원회'를 구성하고 18명의 심사위원이 47년 10월까지 11 번의 심사위원회를 열어 심사한 끝에 48년 1월에 확정, 시행한 '우리말 도로 찾기'운동은 다음과 같은 기본방침을 정하고 있다.
① 우리말이 있는데 일본말을 쓰던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② 우리말이 없고 일본말을 쓰는 것은 우리 옛말에서 찾아 쓰고 비슷한 옛말에 뜻을 새로 작성하여 쓴다. ③ 옛말에 없는 것은 새로 말을 만들어 쓴다. ④ 한자말의 경우에는 일어식 한자말은 버리고 전부터 써오던 우리 한자말을 쓴다.
이 기본방침을 생각하면서 넋두리 한번 다시 읊어 볼까?
▲제: 예술이, 영화가, 문학이 언제 그리 많이 죽었는가. '예술제' '영화제' '문학제' 따위 제사가 어찌 그리 많은가. 제사제(祭)자의 제는 죽은 신에게 지내는 제사에나 쓰는 글자다. 한자를 쓰는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제사 이외의 뜻으로 쓴 예가 과거에는 없었다. 일본만이 '제'(祭-마츠리)를 서양의 카니발이나 페스티벌처럼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잔치를 일컬어 썼다.
▲연패: 일본말에서는 '연패(連敗)'와 '연패(連覇)'의 발음이 각각 '렌빠이'와 '렌빠'로 구분을 한다. 우리 경우 한글로 써 놓으면 발음이 똑같다. 당연히 '연패'와 '연승'으로 쓰거나 발음이 다른 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지:일본말은 집이나 도로 따위 건설을 위해 잘라 놓은 터를 시키치(敷地)라 한다. 집터는 흔히 야시키(屋敷)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부지란 말이 없었다. 터, 빈터, 집터 등 좋은 우리말 버리고 왜 어색한 부지인가.
▲계단:일본말은 높은 건물의 1층(一層) 2층(二層)을 1계(一階-잇가이) 2계(二階-닛가이)라 한다. 우리말은 층계(層階)이고 일본말은 계단(階段-가이당)이다. 왕조실록(한문)에 층계(層階)와 단(段)이 있다. 그러나 실록의 한글 번역은 단(段)을 일본인들이 쓰는 계단으로 풀어 왜독을 새로 묻혀 놓고 있다.
'우리말 도로 찾기' 때 찾아 놓은 934개 낱말과 건국 초기 우리말 정화 관련 기록들을 적어도 우리 국어연구원과 교육부와 문화 관련 부서 공직자들, 그리고 언론(특히 KBS)은 반드시 한번 쯤 읽어 봐야할 것이다. 한국의 대 개혁 과제에 '나랏말씀 지키고 가꾸기'가 꼭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륵스륵 이지러지고 더럽혀지는 '나랏말씀 오염'은 앞으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겨레말 사전'사업을 위해 남북한이 힘을 모으자면서 제 몸에 밴 중독을 품어 안고 어떻게 겨레말을 다듬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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