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연 변호사 |
후보자는 위 3인을 싸잡아서 무능함과 타락함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 중임에도 무당만 신봉하는 등 사실상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는데, 과연 사실인가.
위 3인 중에서 엄귀비는 신분이 후궁임에도 신학문을 받아들이고 여럿의 근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나름대로 조선 근대화에 적지 않은 노력을 한 바 있기에 한 번 언급해 보겠다.
일반인들은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녀는 키는 150㎝ 정도에 체형도 상당히 뚱뚱한 편이어서 미녀는커녕 추녀(醜女)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명성황후의 지밀상궁으로 방 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처지였다. 명성황후는 후궁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고종 초기 10년 동안에 정무는 섭정 흥선대원군이 도맡았으니 할 일이 없는 고종은 궁녀들과 어울리다가 곧잘 자식을 만들어 내곤 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후궁만 7명을 두었는데, 대부분 성깔 있는 중전에 의해 쫓겨 났지만 그래도 황후는 불안했다. 그래서 못생긴 자신의 지밀상궁이던 엄상궁으로 하여금 고종을 단도리하라고 대전 상궁으로 발령을 냈는데, 그런 엄상궁이 고종을 녹여서 어느 날 성은(聖恩)을 입었다며 치마를 뒤집어 쓰고 나와서 황후를 경악시켰다.
당연히 황후는 사가(私家)로 그녀를 내 쫓았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엄상궁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가에서 쥐죽은 듯이 보내야 했다. 그 사이에 국제정세가 요동을 쳤다. 청일전쟁(1894년)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에서 청 세력이 소탕되고 친일정부가 꾸려졌다. 고종이건 황후건 실권이 없었다. 일본은 전리품으로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얻었는데, 이것이 너무 커서 체했다.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힘을 합쳐 일본에 압력을 넣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케 했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 한다.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고종과 황후는 급속히 러시아쪽으로 기울어 조정에 친러파가 득세를 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1895년 경복궁에 자객을 보내 황후를 살해하였는데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궐도 친일파들이 지키고 있어서 말만 임금이었다. 당시 조선의 상비군이 총 4000명에 불과해서 대궐 수비도 스스로 하지 못했다면 믿겠는가. 식사에 독약이 들어있을까봐 마음놓고 먹지도 못했다.
고종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생각난 사람이 그 예전 엄상궁이었고, 부름을 받은 엄상궁은 10년 만에 환궁을 하였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던 황후는 없었으므로 당연히 대궐의 안주인이 되었다.
엄상궁은 지략도 담력도 좋았다. 자신이 사는 길은 고종이 사는 것이라고 믿은 그녀는 친일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책략을 써서 고종과 세자(순종)를 가마에 태워 대궐 뒷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켰다(1896년, 아관파천).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 침실에서 1년 동안 고종을 지극히 섬겼는데, 운도 좋아서 4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다. 왕자를 생산했는데,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다.
엄상궁은 명성황후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렸다. 세상을 보는 안목도 높았다. 신학문이 나라를 구한다며 사재를 털어서 양정의숙,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등을 잇달아 설립하였다. 품계는 황후 바로 밑자리인 '황귀비(皇貴妃)'까지 올라갔다. 그녀는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마음고생으로 1911년에 사망했다. 그녀가 세운 학교들은 이미 100년이 넘었고, 지금도 명문이다.
문창극 후보자가 앞서 본 바와 같이 고종, 명성황후, 엄귀비 등 3인을 싸잡아 비난하며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 일본이 우리를 합병해도 좋다. 이씨 왕실만 살려달라”라고 애걸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혹평에 대해 지하에 있는 엄귀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시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 억울해 할 것 같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