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영주 갤러리 봄 관장 |
얼마 전 필자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큼 큰 대기업에 다니는 임원이 방문했는데,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자신은 보수가 높고 큰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는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고 바빠서 삶이 각박할 수밖에 없었던 중에 이렇게 새로운 삶의 모습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동안 일에 쫓겨 미술관은커녕 영화 한 편조차 마음 편히 보러 다닌 적이 없었단다.
비록 넓고 화려한 공간은 아니지만, 200 여개쯤 켠 촛불, 벽면을 채운 미술 작품들,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클래식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울려 퍼지는 그 공간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감각들을 깨우고 또 다른 감동을 불어 넣어주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오십 평생을 마음 놓고 쉴 틈 하나 없이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그래서 행복했는지를 물어본다면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는 그. 미술과 음악, 조명, 여러 장식들이 만들어내는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후, 아주 즐거웠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가끔씩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공허감이 있으며, 신체적으로 숨 쉬고 있는 데에는 분명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신체적으로는 전혀 이상이 없어도 정신적으로 힘든 게 몸으로 전이된 듯 실제적인 통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 몸에 있어 정신적인 영역 역시 중요함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질적 공리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존 스튜어트 밀은 “만족스러운 돼지가 되기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밀은 인간이 동물적인 본성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적으로 더 높고 고상한 쾌락을 추구한다고 본 것이다. 나는 종종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가' 싶다가도, 복잡한 심경이 들어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을 때에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 또한 크구나' 하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음식을 먹고 잠을 자면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얼마 전 뇌과학 전문가인 미국 MIT 승현준 교수와 가톨릭 신부인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가 만나 인간의 고유 영역인 '영성'에 대해 나눈 대화가 기사로 실렸다. 승 교수가 연구하는 '커넥터믹스(connectomics)'는 1000억 개에 이르는 신경세포의 연결 전체를 일컫는 커넥텀을 3D 영상으로 구현하는 이른바 인간의 '뇌 지도'를 그려내는 시도다. 승 교수는 '커넥터믹스는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쓰인 방대한 책과 같으며,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되면 그 뜻을 풀어야하는데, 인간의 두뇌는 결국 영생이나 죽음의 문제와 같은 신학이나 철학의 영역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과학으로 찾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역인 '영성'에 주목하는 것 같다.
우리 자신조차 들여다 볼 수 없어 알 수 없으며, 그래서 더 어렵고 복잡한 마음과 생각들을 물리적 포만감이 달래주지 않으며, 논리정연한 과학이 이해시켜주지 않는다. 나는 예술이 바로 그런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을 드러내고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며, 우리 삶에 자그마한 의미나마 계속해서 채워준다고 믿는다. 예술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며, 우리가 메마르고 혼란스럽고 가끔은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낄 때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마음을 어루만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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