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화백(84ㆍ홍익대 명예교수ㆍ사진).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그 자체다. 1950년대 문화 불모지였던 한국미술에 추상미술을 소개한 화가이며, 지난 60여년간 한국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과 맥을 이끌어 왔다. 그는 전후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화시킨 주인공으로, 모노크롬 회화(단색화)의 대가로, '살아있는 현대미술'로 불린다.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살아오고 있는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심에 늘 서 있었다. 그런 그가 최근 열린 본사 주최 제12회 이동훈미술상 심사에서 본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산증인 박 화백을 지난 주말 서울 마포구 성산동 박서보 화백의 작업실 '서보 파운데이션'에서 만났다. <편집자 주>
“현대미술의 5가지 요소는 단순한(Simple), 깨끗한(Clear), 날카로운(Sharp), 활력(Vitality), 뚜렷한(Relief) 등입니다. 여기에 치유(succour)가 포함돼야 하지요.”
▲한국 현대미술의 선두에 서다=작업실에서 마주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 화백에게서는 팔순이 훌쩍 지난 나이를 무색케 하는 강한 열정과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힘차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철철 넘쳐났다. 인터뷰 내내 외국의 여러 미술관 큐레이터와 평론가들과의 만남, 앞으로의 미술 전시와 활동 계획 등 최근의 관심사를 이야기했다. 끊임없이 비워내움을 실천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가다.
박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현대미술의 선두에 서 있었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언제나 시대를 앞서 가는 실험 정신이 있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 '서보'는 제 본명이 아니었습니다. 본명은 박재홍인데요. 6ㆍ25 전쟁이라는 커다란 혼돈의 시기에 선택하게 된 이름이지요. '서보'는 친구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며 지어준 이름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시간이 흘러 내가 유명해지니까 그 친구가 “자기가 '서보'라는 이름을 쓸 걸”하고 후회하더라고요(하하하)… 나의 오늘은 20대부터 80대가 되도록 하루 14시간 이상 변함없이 작업에만 파묻혀 살아온 결과물인데 말이죠.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바보처럼 외길을 걸어온 결과에요. 신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한 일이었죠.”
박 화백의 부친은 그가 어릴 적 '세계적인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늘 믿었다고 한다. 부친은 법률가가 되길 원했지만 그의 선택은 화가였다.
“부친의 바람과 달리 난 동양화가 그리고 싶어서 홍익대학 동양화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청전 이상범 선생님과 고암 이응노 선생님이 스승이었어요. 전쟁이 나는 바람에 비록 한 달 정도밖에 못 배웠지만 말이죠.”
전쟁의 과정에서 동양화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이 못된 박 화백은 서양화로 진로를 바꾸고 6ㆍ25전쟁 이후 10여년 동안 한국 엥포르멜(Informel)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원형질, 유전질, 허상 시리즈를 발표했다. '원형질'시리즈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처절한 극한상황과 인간 실존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검게 타버린 피부, 앙상하게 드러난 뼈다귀, 마치 일그러진 인간 육체 같은 비정형의 그림을 그려냈다.
박 화백은 1970년대부터 '손의 여행'으로 일컬어지는 '묘법(描法)회화'의 정점을 이뤄갔다. 캔버스를 물감으로 뒤덮고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것을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한다. 물렁한 물감은 연필 긋기로 밀려나고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연필로 그리고, 물감으로 지우는 행위의 반복, 그 과정과 결과가 바로 작품이다. 1980년대에는 종이 대신 한지를 사용하는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였고, 2000년대 들어서는 색채로 또 다른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특히 묘법 회화는 회화의 행위성이 끝나면서 작품도 끝난다는 서구의 방법론을 넘어 그 위에 시간이 개입됨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완성에 이른다는 동양 회화의 세계를 잘 담아냈다.
“소위 스님이나 선비처럼 살고 싶었어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참선하는 것처럼, 선비는 권력에 편입해 척결한 상대에 대한 양심의 갈등을 붓글씨나 그림을 통해 인격을 승화시키고, 자신을 순화시켰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로 그림을 그린 거죠. 수신하는 찌꺼기가 바로 그림인겁니다. 한지에 수없이 연필로 그리고 사선으로 잘라 그린 것은 선과 선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닌, 쌓아 올린 골을 다스리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저는 좋은 그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림은 수신(修身)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한거죠. 그림은 생각을 토해내는 공간이 아니라 비워내는 공간입니다.”
▲“변해도 추락하고 변하지 않아도 추락한다”=박 화백의 여정은 다이내믹함 그 자체다. 많은 어록과 더불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박 화백은 대학 4학년 때 반 국전 운동을 벌였다. 그는 1956년 4인전을 통해 반(反)국전을 선언하고 거대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아카데미즘 세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술은 개성이 중요한데 이름만 떼면 모두 비슷한 그림이라며 죽은 예술에 대한 반기였다. 미술계에서는 '박서보 그놈은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이 때문에 박 화백은 졸업 후 취업도 안됐다. 1962년이 되어서야 홍익대 교수로 채용됐다. 하지만 여기서도 반기를 들었다. '교실제', 학생들이 교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제도는 미술교육의 개혁이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내 근처에도 잘 못 왔어요. 잘못된 것을 보면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잘못을 비판하곤 했죠.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입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역시 박서보'라는 소리를 들었죠. 거기 있던 법률 보좌관이 나중에 고등법원장이 된 후 제 그림을 걸고 싶다고 하더군요. 작품 가격이 적어 돈보다도 애국심을 보여 주면 응하겠다고 했더니 대학 총장에게까지 찾아가 부탁하더라고요. 결국 법원장이 애국심을 최대한 발휘했다고 하기에 그려줬지요.”
“변해도 추락하고 변하지 않아도 추락한다”는 그의 대표 어록처럼 그는 평생 쉼 없이 변화하고 변화해 왔다.
박 화백은 자신의 주변에서 보이는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들을 그린다고 했다. 호주 멜버른 대학의 한 교수는 그를 보고 '드럼세탁기 같다'고 평했다.
“제가 본 모든 것들 중에서 아주 좋다고 한 것들은 잔상으로 남아 범벅이 돼 드림세탁기에서 빨래 밀려나오듯 작품이 밀려 나오는 겁니다. 교수가 찾아왔을 때 “제 그림에 다섯 개의 4각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게 있는데 제 답답한 마음을 표현해 숨 쉬는 창”이라고 설명했죠. 그 교수가 코란에도 정신의 창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느낌이라며 반하더라고요. 보고 느낀 일상 경험이 몸과 가슴에서 나와 정신의 세탁기에서 믹서 돼 작품이 되는 거죠.”
현재 젊은 작가들이 남들과 같은 것을 쫓아가는 현상에 대해 그는 “시대는 홍수와 같아 뛰어들면 소용돌이 속에 끌려가 모두 익사하는겁니다. 언젠가는 모두 홍수 속에 익사하고 말 거에요. 자신만의 정신과 본질을 찾아야 해요”라고 조언했다.
▲21세기의 예술은 치유의 수단이다=“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줘야 합니다. 단순히 작가가 자기 생각을 쏟아내는 마당으로 캔버스를 사용한다면 구식에 머물고 말죠.”
21세기는 스트레스 병동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을 치유해줘야 한다는 박 화백의 예술론이다.
“시대가 변하면 예술 그 자체도 본질적으로 변해가야죠. 20세기 그림은 뛰쳐나오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보는 사람을 괴롭히는 폭력을 가하는 그림입니다. 뭐든지 빠른 디지털 시대에는 폭력을 빨아들이는 '흡인지'같은 그림이 필요한거죠. 대낮에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다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빠른 디지털 시대에 따라오지 못하는 개개인이 낙오되는 과정에서 20세기 그림처럼 쏟아내는 그림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빨아들일 수 있는 '치유'의 도구로 그림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걸 비워야하죠. 자기를 비워야하는 겁니다. 그 비워진 자리에 불안한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게 해줘야하죠.”
▲이동훈 미술상 수상은 친화 또는 화해의 표현=박 화백은 본사가 주최하는 제12회 이동훈 미술상 본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동훈미술상 본상은 한국의 근ㆍ현대를 대표하며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확고히 가지고 있는 원로작가에게 수상하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술상이다.
이동훈 미술상은 한국의 근현대를 대표했던 이동훈 화백이 대전지역에 서양미술이라는 씨를 뿌려 대전 화단의 토양을 일구고 대전미술계를 태동시킨 것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상으로 장리석, 김형구, 정점식, 서세옥, 장두건, 전혁림, 강태성, 이종학, 변시지, 안동숙, 박돈 화백 등이 수상했다.
박 화백은 수상 소감으로 '친화'라는 말을 꺼냈다.
“이동훈 선생님은 인품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저를 항상 반갑게 웃음으로 대해주신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반 아카데미즘을 주장해 온 제가 이 상을 타는 것에 대해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과거 저의 행위와 '친화'하는 의미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동훈 선생님의 미술 세계와 열정을 존경하는 뜻이기도 하죠.”
▲앞으로의 계획은=박 화백의 창작 행보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몇 년 전 뇌경색이 온 뒤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박 화백은 하루 12~14시간씩 작업한다. 개인전이나 국제 아트페어는 물론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 전에도 참가하며 활약하고 있다. 그는 미술사에 남겨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 아직도 현대미술을 선도해 가는 작가다.
“며칠 전에 미국 LA의 한 국제적인 화랑에서 찾아와 제 70년대 단색화 운동 작품을 보고 놀라움을 나타내더군요. 거기서 메인작가로 한국작가 5명과 특별전을 할 예정입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제 작품을 보고 놀라면서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전 세계적으로 붐이 일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서보 미술문화재단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미술관을 만드는 일도 계획하고 있다.
“제주도에 전원주택 하나를 마련해 터를 일구는 일을 하며 노동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는 시간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작업도 하죠. 추사 김정희나 우암 송시열이 귀향 왔던 곳인데요. 자연이 훼손되지 않아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귀포 인근에는 미술관이 없어 제 미술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2000여점의 작품을 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작품을 영구 대여 조건으로 자치단체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인 '물방울 화가' 김창열 미술관도 제주도에 있으니 더 잘됐죠.(하하하)”
대담=한성일 문화독자부장(부국장)ㆍ정리=이상문 기자ㆍ박서보 화백 자료사진 제공
●박서보 화백은…
화가이자 교육자로 1950년대 문화적 불모지였던 한국미술계에 추상미술을 소개했다.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성에서 성장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2년 대학 강단에 선 후 199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ㆍ조형미술연구소장ㆍ산업미술대학원장ㆍ미술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교육활동 이외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1977~1979)과 한국미술협회이사장(1977~1980) 고문(1980)을 역임했고, 1994년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파리비엔날레(1963)와 칸국제회화전(1969), 베니스비엔날레(1988) 등 각종 국제전에 출품했고, 대통령 표창, 중앙문화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국민훈장 석류장, 서울특별시문화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원형질(原形質)'연작, '허상' 연작, '묘법(描法)' 연작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일본 도쿄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대표적인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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