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관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
남몰래 치밀어 오르는 분노 말고는 무어라 표현하기조차 두려웠던 사고 초기, 예술계는 당장 예정된 행사와 축제를 하릴없이 연기하거나 아예 접는 일 말고는 달리 어떤 방도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부활절과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나 갔다. 전국에서 아마도 거의 모든 국민이 추모 예배에 참여했겠지만 유가족도 국민도 제대로 위로를 받지는 못한 듯하다.
예술은 무엇이고 종교는 또 무엇인가. 아니, 예술과 종교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긴, 사고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터라 무엇으로도 치유되기는 어려운 시점이기는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 엄청난 상처가 쉬이 아물겠는가.
예술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은 고작해야 취소되거나 연기되거나 기껏해야 누가 볼세라 숨죽이며 치르고 나서 짐짓 시침을 떼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 또한 허망하고 또 허망하다.
예술을 매개로 하는 움직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음악이다. 대중매체에서는 슬픈 음악이, 부족하지만 우리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하다. 특히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내놓은 '천개의 바람이 되어'도 곳곳에서 불리고 있다. 이 곡은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추모곡으로 헌정된 것이기도 하다.
그룹 산울림 출신의 김창완은 자작곡 '노란 리본'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매체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팝송으로 에릭 클랩튼의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도 있다. 숨진 아들을 기리는 이 곡의 노랫말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내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천국에서 널 만나면 넌 옛날과 똑같은 모습일까…'는 우리 가슴을 치고도 남는다. 클래식 음악계도 예외가 아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나 그리그의 모음곡 페르귄트 중 '오제의 죽음'도 요즘 음악회마다 자주 등장하는 메뉴들이다. 어느 장르보다도 음악은 위로와 치유에 적격인 듯싶다.
그러나 이번 일이 어디 추모나 위로 혹은 이른바 '힐링'으로만 그쳐야 할 일이던가. 이번 참사를 두고 많은 이들은 '탐욕스런 이윤'만을 앞세운 '인간미 없는 압축 성장'탓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뿐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가, 더 좁혀서 말하면 지도층이 '사해동포를 위한 보편적 가치'보다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를 우선해 오지는 않았던가. 보편적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약자에 대한 연민, 혹은 자유, 평등, 박애 같은 것들에 다름 아니던가.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방도일 것이다. 그런 감성을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음악에 이어 또 어떤 예술이 나서야 하는가 생각한다. 다른 예술도 있겠으나 이런 역할이라면 나는 특히 연극을 지목하고 싶다. 마침 최근에 여러 개의 괜찮다하는 연극을 보면서 더 드는 생각이다. 연극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유케 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나 부조리를 건드리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셰익스피어에서 시작해도 좋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네 공연장에서도 우리를 보편적 사유의 바다에 빠지게 하는 좋은 연극들이 많은 게 요즘의 흐름이다. 연극이란, 나아가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아니, 나는 예술의 힘을 다시 믿기로 한다. 보편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 음악은, 연극은, 나아가 예술은 더 깊고 넓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보다 더 열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예술이 인간에게 연민의 정을 심어주게끔 애쓰고 또 애쓸 것이다. 내게 그것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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