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동석하신 분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질서'(Ordnung)라고 한다. 이른바 '오르두능'에 대한 독일인의 신뢰와 자부심은 사실 전설적인 것이다. 독일장인 마이스터들의 엄밀성과 전문성은 벤츠, BMW 등으로 대변되는 독일 명품을 낳았고, 독일 철학자들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는 빛나는 독일 관념론의 체계를 이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자들의 관념론과 마이스터들의 명품 정신은 카이저 황제의 제국과, 놀랍게도 히틀러의 독일제국을 구축하는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로 여기에 근대독일, 나아가 근대사상의 비극이 숨어 있다고 진단한다. 독일인의 체제와 질서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초래한 요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아이히만은 그 누구보다도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무고한 수많은 유태인을 살해한 책임자였던 그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죄수들을 실은 열차가 5분 늦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는 가공할 답변을 내어 놓아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제국 질서에 충실한 신봉자였던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여사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법정에 선 그를 관찰하면서 '악(惡)의 진부(陳腐)함'(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의 소장이었지만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 사악한 사람이거나 머리에 뿔이 달리고 엉덩이에 꼬리를 감춘 악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범했던 범죄의 근원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체제적인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일단 잘못된 체제 속에서라면 악은 극히 평범하게 자행되는 일상이 되고 심지어 진부해지기까지 한다는 분석이었다. 그런 체제적 범죄구조 안에서 개인의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근원적 반성도 하지 않는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즉 생각 없는 습관의 비극이라고 아렌트는 질타하였다. 이처럼 질서가 최고의 가치로 존중받는 사회에서조차 인간의 악은 그 흉측한 음모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기록된 것처럼 가장 완벽해 보이는 최상인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악과 고통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본 질서는 고사하고 무질서의 질서, 비상식의 상식이 만연한 사회가 아니던가? 화물을 초과적재하고, 승객을 수용초과하고, 이윤을 위해 불법 개조하는 것쯤이야 우리 모두가 기꺼이 용인하는 그런 일상적인 일들 아니던가? 초등학교 때는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살아남았고, 중·고등학교 때는 교통지옥 통학버스에서 살아남았으며, 대학교와 청장년기에는 생존경쟁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안전사고에서 살아남았던 우리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질서와 규정은 '교과서'에만 실려 있는 쇼윈도 지침에 불과하고 나름대로의 요령있는 무질서가 능력있는 초법적 질서라고 여기며 잘못된 삶의 법칙을 자위하지 않았던가?
질서를 극도로 존중하는 완벽해 보이는 사회에서라도 잘못된 습관에 중독된 '생각없는' 개인들이라면 '악의 진부함'을 자행하는 비극적 체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하였다. 그렇다면 질서와 규정을 극도로 무시하는 한국같은 사회와 '생각없는' 개인들의 결합이라면? 그 결과는 '악의 진부함'을 넘어서는 참담한 '재난의 진부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되는 국가 재난의 비극적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정말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의 참사는 우리 모두가 '생각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최후통첩이자 슬픈 경적(警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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