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국원]재난<災難>의 진부<陳腐>함이라는 병

  • 오피니언
  • 사외칼럼

[배국원]재난<災難>의 진부<陳腐>함이라는 병

[중도마당]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승인 2014-05-12 13:51
  • 신문게재 2014-05-13 16면
  •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옛 동독의 중심지였던 드레스덴 근교의 목적지를 찾아 농촌 길을 운전한 적이 있다. 두 시간여의 주행 동안 휴지조각, 나무 조각 하나 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시골길은 비로 씻은 듯 정결했고, 도로는 마치 새로 포장한 듯 깔끔했다. 그리고 차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칼같이' 신호를 잘 지키던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석하신 분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질서'(Ordnung)라고 한다. 이른바 '오르두능'에 대한 독일인의 신뢰와 자부심은 사실 전설적인 것이다. 독일장인 마이스터들의 엄밀성과 전문성은 벤츠, BMW 등으로 대변되는 독일 명품을 낳았고, 독일 철학자들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는 빛나는 독일 관념론의 체계를 이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자들의 관념론과 마이스터들의 명품 정신은 카이저 황제의 제국과, 놀랍게도 히틀러의 독일제국을 구축하는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로 여기에 근대독일, 나아가 근대사상의 비극이 숨어 있다고 진단한다. 독일인의 체제와 질서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초래한 요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아이히만은 그 누구보다도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무고한 수많은 유태인을 살해한 책임자였던 그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죄수들을 실은 열차가 5분 늦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는 가공할 답변을 내어 놓아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제국 질서에 충실한 신봉자였던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여사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법정에 선 그를 관찰하면서 '악(惡)의 진부(陳腐)함'(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의 소장이었지만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 사악한 사람이거나 머리에 뿔이 달리고 엉덩이에 꼬리를 감춘 악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범했던 범죄의 근원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체제적인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일단 잘못된 체제 속에서라면 악은 극히 평범하게 자행되는 일상이 되고 심지어 진부해지기까지 한다는 분석이었다. 그런 체제적 범죄구조 안에서 개인의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근원적 반성도 하지 않는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즉 생각 없는 습관의 비극이라고 아렌트는 질타하였다. 이처럼 질서가 최고의 가치로 존중받는 사회에서조차 인간의 악은 그 흉측한 음모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기록된 것처럼 가장 완벽해 보이는 최상인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악과 고통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본 질서는 고사하고 무질서의 질서, 비상식의 상식이 만연한 사회가 아니던가? 화물을 초과적재하고, 승객을 수용초과하고, 이윤을 위해 불법 개조하는 것쯤이야 우리 모두가 기꺼이 용인하는 그런 일상적인 일들 아니던가? 초등학교 때는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살아남았고, 중·고등학교 때는 교통지옥 통학버스에서 살아남았으며, 대학교와 청장년기에는 생존경쟁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안전사고에서 살아남았던 우리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질서와 규정은 '교과서'에만 실려 있는 쇼윈도 지침에 불과하고 나름대로의 요령있는 무질서가 능력있는 초법적 질서라고 여기며 잘못된 삶의 법칙을 자위하지 않았던가?

질서를 극도로 존중하는 완벽해 보이는 사회에서라도 잘못된 습관에 중독된 '생각없는' 개인들이라면 '악의 진부함'을 자행하는 비극적 체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하였다. 그렇다면 질서와 규정을 극도로 무시하는 한국같은 사회와 '생각없는' 개인들의 결합이라면? 그 결과는 '악의 진부함'을 넘어서는 참담한 '재난의 진부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되는 국가 재난의 비극적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정말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의 참사는 우리 모두가 '생각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최후통첩이자 슬픈 경적(警笛)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2.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3.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4.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5. [사진뉴스] 한밭사랑봉사단, 중증장애인·독거노인 초청 가을 나들이
  1. [WHY이슈현장] 존폐 위기 자율방범대…대전 청년 대원 늘리기 나섰다
  2. 충청권 소방거점 '119복합타운' 본격 활동 시작
  3. [사설] '용산초 가해 학부모' 기소가 뜻하는 것
  4. [사이언스칼럼] 탄소중립을 향한 K-과학의 저력(底力)
  5. [국감자료] 임용 1년 내 그만둔 교원, 충청권 5년간 108명… 충남 전국서 두 번째 많아

헤드라인 뉴스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충청권 소방 거점 역할을 하게 될 '119복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다. 충남소방본부는 24일 김태흠 지사와 김돈곤 청양군수, 주민 등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9복합타운 준공식을 개최했다. 119복합타운은 도 소방본부 산하 소방 기관 이전 및 시설 보강 필요성과 집중화를 통한 시너지를 위해 도비 582억 원 등 총 810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위치는 청양군 비봉면 록평리 일원이며, 부지 면적은 38만 8789㎡이다. 건축물은 화재·구조·구급 훈련센터, 생활관 등 10개, 시설물은 3개로, 연면적은 1만 7042㎡이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