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광복 후 처음 나온 한글교과서(1학년)는 이렇게 시작했다. 46년 광복절 직후 미 군정청은 행정조직체제를 조선총독부 때 직제대로 두고 각부 국장을 '조선사람'으로 앉혔다. 김병로 조병옥 정일형 등 당시 신망 있는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문교부장을 맡은 유억겸(당시 연희전문 교장) 선생은 가장 시급한 교과서업무를 총괄할 편수과장에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을 불러 맡겼다. 편수관으로 박창해 교수를 불렀다. 그러나 박창해 교수는 '내 이력서에 점령군 군정청근무경력을 기록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멍청한…. 영어나 일본어 교과서를 만들자는 게 아니야. 우리말 우리글로 우리 교과서를 만드는 거야. 우리가 만드는 거다. 우리가 못한다면 일본인 데려다 만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은사인 두 분의 서슬 퍼런 호령에 박창해씨는 피할 수가 없었다. 학무국의 세 분은 혼신의 힘을 다해 '훌륭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원대한 겨레의 이상과 우리 문화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넘쳐 있다. 이 교과서는 6·25전란 이후 강소천, 최태호 선생 등 아동문학가의 주도적인 참여로 상당기간 우리 국어교과서의 모체가 되었다.
그 때 한글교과서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나 그 정신을 기록한 자료는 물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떠나고 없다. 이 교과서에 대해 미국의 문화침략 운운하며 폄하하는 일이 있었다. 몇 해 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이에 대한 연구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발표와 토론이 그들이 미리 정해 놓은 방향으로 쏠려가는 것을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라며 놀라워했다. 그 뒤 여러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비록 군정청에서 제작한 교과서이긴 하나 애국지사들의 정열과 정성이 담긴 큰 과업이었다는 내 주장에 아직 반론은 없다. 다음에 이를 취재할 때 박창해 교수와의 문답 가운데 일부를 옮겨 보았다.
▲그 교과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무엇을 들 수 있는가?=우선 대화체 교과서라는 것. 선진국의 교과서를 갖다놓고 살펴보니 거의 '대화체'로 서술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가정 이야기가 많았다. 글자를 가르치기 위한 낱말 중심의 '소나무, 아버지, 어머니…'식의 일제 강점기의 조선어독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들 수 있다. 일본이 우리보다 20년 늦게 교과서를 개편하면서 '일본이 한국에 20년 뒤졌다'며 놀라워했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시기에 세계 여러 나라 교과서를 다 볼 수 있었는가? =그때 군정청 교육담당 책임자였던 로카드(Rockard) 대위는 미국의 명문 교육대인 피바디 출신이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이 모두 대령 중령인데 반해 직급은 낮았으나 교육에 대한 식견과 이해가 남달랐다. 행운이었다. 모든 것을 열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세계 각국 교과서를 구해 달라고 하자 미국과 국교가 있는 16개국 교과서를 보름 만에 구해 주었다. 시급한 '군수물자'로 분류해 최우선 공급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출신이 배제되고 연세대 출신만 참여한 배경은?=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은 교회계통을 통해 미국유학 경험이 있는 인력이 연희전문에 많아서였다.
▲어린이다운 아빠 엄마 대신 아버지, 어머니 호칭은 어른스럽지 않은가? =아버지 어머니 호칭은 당시 가정에서 보통 쓰고 있었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 품에 한발 벗어난 독립심을 기르고 유취(乳臭)한 아기티를 벗어야하지 않는가.
세상은 많이도 바뀌었다. 대화체 교과서는 어느 새 일제강점기 때처럼 '우리' '마을' 등 낱말체제로 바뀌고, 아버지 어머니는 젖비린내 나는 '아빠 엄마'로 바뀌었다. 최근 역사교과서 논쟁이 사생결단의 '무찌르자!'판으로 번지는 모습을 보면서 옛 지사들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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