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곤 대전노숙인지원센터 소장 |
필자가 일하는 센터에서는 매일 2~3차례의 거리 상담을 진행한다. 특히 매일 00시를 기준으로 두 시간 동안 주요 노숙지역을 돌며 하는 상담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이는 그 시간이 돼서야 거리에서 노숙인들과 제대로 상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인 하면 역주변이나 거리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져 누워 있거나 거리를 배회하거나 구걸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전역 광장에서 대낮부터 만취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아니다. 진짜 노숙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낮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거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회하다가 늦은 저녁에 되어서야 지하도나 다리 밑에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기 전인 새벽 4~5시께면 잠자리를 정리하고 고단한 하루를 시작한다. 이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사회가 가진 사람의 가치에 대한 편향적 시각 때문이다. 누구도 스스로 노숙을 선택하지 않는다. 노숙이라는 상황에 처하면서 자기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노숙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숙에게 선택당한 이들이 바로 노숙인이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고 극빈이라는 상황에 선택당한 이들에게 또 다른 두려움은 경쟁사회에서 실패했다는 절망과 패배자라는 사회의 시선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다. 노숙화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두려움과 자괴감은 자아를 파괴하고 더 절망하게 하며,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다. 노숙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지 15년 만에 노숙인은 우리 사회의 가장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 찍혀 버렸다. 그리고 '노숙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동시에 그들의 인생과 내면은 무시되고 단순히 '노숙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웃긴 것은 '노숙'이라는 수식어는 사회복지 현장에서조차 소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여성을 위한 시설은 많지만 '여성노숙인'은 갈 곳이 없다. 노인을 위한 시설은 많지만 '노인노숙인'이 갈 곳은 없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많지만 '장애노숙인'이 서비스를 받을 곳은 없다. 이제 그들은 그냥 '노숙인'일 뿐이다.
얼마 전 모 지구대에서 센터 앞에 몸이 아픈 노숙인을 내려두고 가버렸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인수인계를 한 것도 법적인 절차대로 서류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너무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냐는 전화에 시설에 데려다 줬으면 시설에서 알아서 해야지 그건 우리 일이 아니라고 한다. 매년 경찰에서 의뢰되는 건수가 100여 건이 넘지만 상담센터를 시작하고 10년 동안 제대로 절차를 지킨 것은 딱 한건뿐이었다. 하지만 치매 걸린 노인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데려다 놓고, 가출한 장애인을 신원조회조차 하지 않고 의뢰하고, 저기가 센터니 찾아가라며 근처에 내려주는 그들의 행위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노숙인을 대하는 태도다. 그들은 말 한마디에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 공권력을 가진 공무원의 신분인 그들에게조차 노숙인은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없는 '노숙인'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경쟁사회에서 타인과의 경쟁과 그 경쟁에서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가치가 사람이 가진 본질적 가치의 전부일 수는 없다. 우리가 소유한 물질은 매우 유동적이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본질적 가치는 늘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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