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일본이나 중국 언론이 서방 언론과 구분되는 점은 타산지석(他山の石) 또는 반면교재(反面敎材) 등 목적론적인 인식의 틀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나 쓰촨 지진 때 건조하고 냉정하게 의식과 제도를 다룬 나 자신의 방식도 그랬다. 독일 언론은 '잠재적 희생자들의 공책을 인용했다'(zitierten aus Schulheften von potenziellen Opfern)며 감정으로 물들인 재난 보도를 꼬집기도 했다. '불투명하고 의무를 다하지 않고 비겁한'(an opaque, undutiful and craven) 기업문화를 지목한 쪽은 미국 경제지 포브스다.
전 지구적으로, 실시간으로 이처럼 대한민국 '생얼'을 들켜버린 요즘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풍랑으로 몇 나라를 표류한 진도 홍어장수 문순득을 만나 선박 '논문'을 쓴 이강회다. 200년 전 이강회는 “우리는 늘 한산도 대첩을 사방의 나라에 요란하게 뻐긴다. 어찌 전선(戰船)의 공이겠는가”라며 배 만들기를 하나의 국책으로 제시한다. 시골 학자의 간절한 염원을 훨씬 넘어 한국은 조선업 1등 국가이면서 주요 중고 선박 수입국이다. 내구연한을 30년으로 상향하자 95개 항로의 연안 여객선 173척 중 16년 넘은 배는 63척으로 늘어났다. 충남 서해안 7개 항로의 여객선 10척, 규제완화의 돛을 달고 떠다니는 정기·부정기 여객선과 관광유람선들은 고철값에 사들인 세월호보다 나을 게 없다고 보면 된다.
외신들도 의아해하는 부분이다. 선박도 선박이지만 지방자치단체 것까지 모두 3200개의 재난 대응 매뉴얼은 '허당'이었다. 속옷 바람 선장의 비열함, 귀 팔랑대며 코 킁킁대며 그들만의 신의를 좇는 관료 마피아의 봐주기 관행도 외신은 놓치지 않는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설에서 '정부와 관련 업체 간의 자동회전문'(the revolving door between government and industry)을 깨부수라고 충고한다. 안전망을 믿고 줄타기하는 서커스 소년 신세 같은 국민, 초기 2~3분이면 선실에서 갑판 위로 올려 보낼 시간이다. 그런데 그 어떤 실종자도 생존자로 돌려놓지 못한 원인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봤다.
제 구실 못한 IT강국의 첨단장비, 현장의 비예측성을 모르는 위기관리 능력, 시스템과 마인드 부재는 드라마틱한 반전과 안타까운 기대마저 꺾었다. 천진하고 착한 아이들은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기어오르다 고장난 세상을 떠나갔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발전과 성공에 사로잡혀 국가가 능력시험에서 떨어진 것'(a failed test of capability in a country obsessed with progress and su-ccess)으로 혹평했다. '너무 급속히 성장하다 사고가 발생할 많은 지름길들(a lot of shortcuts)이 만들어졌다'라는 뉴욕타임스 관점은 따끔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은 “나쁜 문화가 아니라 나쁜 정책이 여객선 재난을 불렀다”(Bad policy caused the ferry disaster, not bad culture)고 분석한다. 서방 언론은 그러나 그들 300년의 변화를 30년에 일군 발전 경험에 따른 문화지체, 나쁜 문화를 포함해 전(前)근대와 후(後)근대와 반(反)근대가 섞인 구조 전체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신은 우리가 감정에 젖어 무심히 흘려버리는 문제들을 들춰냈다. 아사히신문은 끝까지 교훈을 챙긴다. 사설에서도 '아무리 기술이 나아지더라도 안전의 마지막을 지키는 방법은 인간의 의식밖에 없다'(どんなに技術が進んでも、安全の最後の守り手は人間の意識でしかない)고 썼다. 이강회가 이 대혼란을 봤으면 '국가를 경영하는 큰 정사'를 '배 만드는 능력'에서 '안전'으로 정정했을 것 같다. '한국호' 개조에 필요한 재료는 불안이 아닌 안전의식이다. 꽃 같은 2학년들을 잃은 비탄과 분노의 악순환에서 이제 빠져나갈 시간이라는 결론도 조심스럽게 얻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반성 이상의 성찰로 우리 모습을 직시하자는 뜻에서 짧은 외국어 실력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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