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은주]때 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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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은주]때 늦은 후회

[교육단상]갈은주 아산 월랑초 교사

  • 승인 2014-04-29 14:06
  • 신문게재 2014-04-30 16면
  • 갈은주 아산 월랑초 교사갈은주 아산 월랑초 교사
▲ 갈은주 아산 월랑초 교사
▲ 갈은주 아산 월랑초 교사
“흥!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계단에서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돌리고 걸어가는 아이. 그 마음을 알기에 뒷모습만 바라보다 교무실로 들어왔다. 지키지 못한 아이와의 약속으로 인해 2014년 3월 첫날은 아련하게 지나가 버렸다.

2013년 2학년 담임으로 아이를 처음 만났다. 교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복도에서 빙빙 돌다가 들어오라는 소리에 교실에 들어와서는 전혀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 제 마음대로 장난하고 돌아다니다가 만들기라도 하는 시간이면 준비물이 아무 것도 없다. 우울증이 있는 아이 엄마는 외부와 접촉을 단절한 사람이고, 아빠에게 전화하면 엄마하고 이야기하라는 말 한마디로 전화를 끊었다. 게다가 아이는 어떤 것을 물어도 묵묵부답.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지구를 그려 놓고 뚝뚝 떨어져 있는 세 사람 그림이 전부인 종이를 내밀고는 설명해 달라는 말에 일본에 아빠, 중국에 엄마, 한국에 자기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물어서 알아낸 아이의 상황을 실감하며 그동안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에 가슴이 시렸다.

그 후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다,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 그날 할 일을 다 마치지 않았다 등 각종 핑계를 대어 아이를 남겼다. 함께 숙제도 하고, 집중하지 않았던 교과 공부도 시키고, 못 외운 구구단을 외우게 하면서 둘 만의 시간을 늘려갔다. 그런 시간이 늘면 늘수록 내 주변에서 서성이는 아이.

그러던 아이가 12월 어느 날부터 다시 말수가 없어졌다. 답답했던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묻고 또 묻기를 수차례. 아이의 대답은 3학년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이 무섭다고 했다. 누구나 새로운 시작에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적응속도가 느린 이 아이의 느낌은 그것과는 다를 것 같음을 알기에 3학년 담임을 하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진짜인지 몇 번을 거듭 확인한 아이는 다시 주위에서 맴돌았고, 나 역시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배신을 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긴 했지만 약속을 못 지킨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다시 마주친 아이는 꽤 이른 시간에 등교하고 있었다. 2학년 때 첫째 시간 시작할 때쯤 오던 모습과 너무도 다르기에 3학년이 되어 부쩍 컸다고 칭찬했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 숙인 채 조용히 하는 말이, “2학년 때 약속했잖아요.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하고 저는 일찍 오겠다구요.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했잖아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담임이 되겠다고 약속하면서 일찍 오면 좋겠다고 했던 내 말, 고개를 끄덕인 적도 없고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듣기만 했던 아이가 그 말을 약속으로 기억했던 것이다.

25년이라는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면서 아이들에게 했던 크고 작은 내 약속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 약속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꼭 지킬 수 있게 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 번 한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어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무척이나 강조하였다. 아이들은 그 말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나는 신중하지 못한 생각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버렸고 그것으로 인해 아이를 실망시켜서 거짓말을 한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어버린 약속인데도 아이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면서 아이 마음에 내가 남겼을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과 실망스러움의 앙금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해 보았다. 내 눈앞에 있는 아이의 어두운 얼굴을 펴주겠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일까. 이 아이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이 아이와 함께 자라서 나중에 나처럼 헛된 약속을 하게 되진 않을까. 생각은 늘 앞서가야 하는데 그 순간의 생각만큼은 정말 뒤떨어진 것이었다는 한심함으로 스스로를 자책했다.

참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살면서 이제 선생님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자만했던 나는, 아직도 아이에게 한 수 배우는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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