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심 충남대 영문과 교수 |
열하일기는 우리나라의 르네상스시기를 주도한 군주로 꼽히는 정조대왕 시절 중국 열하지방(만리장성의 북동쪽으로 70여㎞ 떨어진 하북성에 있는 지역이름)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 선생이 쓴 기행문 형식의 연행문학 작품으로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2010년에서야 최초로 영문판(The Jenol Diary)이 출간 될 정도로 사용된 한문이 난해하고, 당대의 사회-역사-문화-서민들의 생활을 방대하게 기록한 기행문이다. 연암이 44세 되던 1780년에 중국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여름별궁이 있던 열하(영어로 'Jehol' 지역) 지방으로 여행하면서 쓴 책이다. 그림과 삽화 등이 풍부하고, 한문으로 쓰여 있지만 구어체적인 문체나 일상적인 어투도 마다하지 않는 등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글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문체의 파격성으로 인해 정조대왕은 열하 일기를 '저속하고 고전적이지 못하다'고 맹렬히 비평했다. 그러나 그 말은 임금조차 그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는 말이 된다.
이 열하 일기중에 '옥갑야화'편이 있는데, 옥갑 여관에서 듣고 알게 된 여러 이야기를 흥미로운 형식으로 엮고 있다. 또, 역관들의 이야기도 가끔 나오는 데, 오늘 날 국제통번역사에 해당하는 역관들이 230여년 전에는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위상을 차지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여러 대목이 있어 나는 자연히 흥미를 갖게 됐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한 역관이 빈털터리로 북경에 들어가서, 묶게 된 숙소의 주인인 중국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다. 그 중국 주인이 깜짝 놀라, 연유를 묻자, 압록강을 건너올 때 남의 돈을 몰래 숨기고 들어오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자신의 돈까지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생겼는데, 살길이 막막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자결하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중국 주인은 그 조선의 역관에게 만금을 빌려주면서, 5년 동안 재물을 늘려나가 만금을 벌게 되면 본전 만금을 갚으라고 했다. 그 역관은 중국 주인이 빌려준 만금으로 장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부자가 되자 역관의 명부에서 자신을 삭제하고, 북경가는 발길을 아예 끊어 버렸다. 세월이 흐른 후에 그의 친구가 북경에 가게 되자 그 친구에게 금 백냥을 주면서, '혹시 중국 여관 주인을 만나면 자신의 가족이 모두 전염병으로 몰사했다고 거짓 말할 것'을 은밀히 부탁했다. 그 친구가 북경에 가니, 정말로 단골집 중국 주인이 이 역관의 안부를 물어왔고, 친구는 역관의 부탁대로 거짓말을 하니, 중국 주인은 가엾은 역관을 위해 매우 슬퍼하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돈 백금을 친구에게 주면서 그 역관의 일가족이 몰살했으니, 제사 지내줄 사람도 없을 터, 그 돈 백 금으로 재를 올려 역관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했다. 거짓이 들통 날까 두려웠던 그 친구는 중국 주인이 주는 돈 백금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와 보니, 그 역관의 집이 실제로 역병에 걸려 몰사해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옥갑야화'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말에도 씨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중구삭금(衆口 )이란 말이 있는데, '군중의 말은 쇠도 녹인다'라는 뜻이다. '중구삭금'의 심정으로 우리는 세월호 사고에서 기적적인 생환소식이나, 아픔 치유의 기적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국 개신교에 흔히 통성기도라는 것도 있다. 마음속에서 생각만으로 기도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 내어 말을 하고 보면, 훨씬 더 진정성과 실현성이 절실해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매우 한국적인 개신교의 모습이다. 물론 불교에도 만트라(Mantra)라는 방식의 기도법이 있다. 일정한 진언과 다라니를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 말로써 염하니, 염불공덕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리를 내 말을 하자면 우리의 뇌가 복잡한 작업을 해야 하고, 우리의 발성기관도 정교하게 움직이거나 주어진 일정한 기능을 해야 한다.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이 많은 국민이 이구동성으로 기도하고 염원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뿐인데 모든 국민이 입을 모아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봄날이 가듯, 허망한 여러 날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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