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인석 수필가 |
이제 와서 선원교육이 어떻고, 안전점검이 어땠었느냐는 등의 뒷북치는 너스레는 모두 산〔生〕자들의 호들갑일 뿐이다. “조용히 기다리라”는 누군가의 방송에 따라 천진무구한 학생들은 구명복 한번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채, 시시각각죽음으로 침몰하는 암흑의 선실 내에서 두려움과 싸우며 구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구명의 기적은 없었다. 어린 학생들과 일반승객들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절박한 순간까지 죽음의 신이 어른대는 허공에 “살려 달라”고 기구하는 문자메시지만 띄워 보냈다니 부모 마음은 더욱 안타깝고 비통하다.
날마다 비행기가 수 십대씩 뜨고, 선박이 수백 척 동원되고, 잠수부 전문가들까지 수 백 명씩 동원돼 북새통을 떨었지만 침몰된 절망은 끝내 구해내지 못했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들이 찾아가고, 뻔뻔스런 정치인들까지 찾아갔지만 갑론을박, 숱한 말들만 쏟아냈을 뿐, 지난날 정치통치 부실로 누적된 총체적 죗값은 애꿎게도 펴보지 못한 채 저버린 어린 영령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슬프고 억울하다. 책임은 정치다. 오호애재(嗚呼哀哉)를 천만번 뇌까린들 무슨 소용 있나. 진실로 참회의 날개를 펴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을 것을 누구도 담보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문방송, 숱한 언론매체들까지 떼 지어 달라붙었지만 아무 보탬 없이 헛소문, 거짓통계, 무성한 말잔치, 불신만 키웠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죄 없이 세상을 달리한 영혼들만 억울하고 분통할 뿐이다. 태우고 또 태워 하얀 재만 남은 유족들의 메마른 가슴마다엔 천추에 지울 수 없는 한의 자국만 얼룩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에 숱하게 많은 대형 사고를 체험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겪어온 사례지만, 근본원인은 '설마'라는 불찰 때문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은 그냥 속담이 아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도 귀 아프도록 들어온 경구다.
그러나 지난날 정치와 통치는 때릴 때만 돌아가는 '팽이' 성질만 갖고 있었다. 원인과 책임을 따지고, 법과 규정을 따지는 것도 당장의 호들갑뿐이었다. 정치, 누구의 혈세를 먹고 존재하는 권력인가?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규칙이나 사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가녀린 눈빛도 외면하고, 선량한 승객들의 절규도 내동댕이친 채 선장, 선원들은 나만 살겠다고 탈출했다. 물론 감독당국은 주기적으로 점검도 하고 교육도 했다. 그러나 담당공무원도, 해운회사 종사자들도 모두 형식적 거짓말뿐이었다. 모종의 이유와 관행적으로 따라붙는 '설마' 때문이었을 게다. '설마'는 사람 잡는 고질병이다.
그동안의 대형 사건사고들이 모두 그랬다. '설마'가 만연된 우리사회엔 지금도 곳곳마다 죽음을 부르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최종의 참사책임은 뻔뻔스런 정치다. '민생정치'가 시급한 이유다. 진실정치, 민생정치가 없었다. 국민들이 투표로 위임해준 정치권력은 반드시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현장에서 두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팽목항 부두에는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대는 부모들의 애절한 절규가 자지러지고 있다. 죽음 되어 돌아오는 절망의 만남과 죽음조차도 만날 수 없는 기다림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있다. 정치가 슬프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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