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채소장수 물병을 던지다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이승선]채소장수 물병을 던지다

[논단]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4-04-17 13:58
  • 신문게재 2014-04-18 16면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스물다섯 살 청년은 공원 근처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다. 공원에 가서 나물을 팔기도 했다. 모처럼 귀한 쇠고기 국물에 아침밥을 먹던 그 날도, 청년은 논밭 일을 나가는 농부처럼 태연자약했다. 식사를 마친 청년은 공원을 향해 떠났다. 공원에 가면 별 쓸모가 없어질 거라며 자신이 차고 있던 값비싼 시계를 벗어 선생의 값싼 시계와 바꿨다. 겨우 차비 남짓한 돈을 가지고 갈 뿐, 나머지는 모두 선생에게 꺼내 주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선생의 목메인 인사에 청년은 차창으로 그저 머리를 숙여 평온하게 답례했다. 공원에서는 잔인한 생일잔치가 열렸다. 그 날, 야채 바구니 대신 도시락 하나와 물병을 어깨에 메고 간 채소장수 청년은 여느 때처럼 누비고 다녔던 공원의 행사장에 다가가 소리 없이 물병을 툭 던졌다. 도시락은 던지지 못했다. 붙잡힌 채소장수 청년은 비로소 한마디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백범일지>와 독립기념관의 <항일 의열투쟁사>에 기록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다. 중국 청도의 세탁소를 거쳐 상해의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윤봉길은 백범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홍구공원 거사를 도모하였다. 거사 일정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자 채소장수 청년은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을 자리를 찾았노라며 더불어,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편안해졌다고 고백한다. 오히려 호랑이 백범이 윤봉길을 태운 차가 4월 29일 아침 홍구공원으로 질주할 때 목이 메어 울먹였다. 채소장수 윤봉길이 던진 물병 폭탄에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불의와 침략의 원흉들이 여러 명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윤봉길의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인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채소장수 윤봉길은 충청도 예산 사람이었다.

며칠 전,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은 '충청도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웃겼나'라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인구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작으나 유독 '웃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희극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다고 전했다. 충청도에 희극인이 많은 까닭을 어떤 이는 분쟁이 다발하면서 생겨난 은유적이고 에두르는 표현이 몸에 밴 것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여유와 긍정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필자는 충청도에 '웃기는' 희극인이 많은 이유를 하나 더 보태려고 한다. 남을 웃기는 충청도 사람도 많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독립투사·의사·열사가 유난히 많은 지역도 충청도이다. 채소장수 윤봉길을 비롯 신채호·한용운·유관순·김좌진·서재필·이상재·조병옥·이종일·이범석·이동녕·이상설·홍범식 등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충청도에서 나고 자랐다. 충신으로 일컫는 최영·성삼문·김종서·계백의 고향도 충청이다. 나지는 않았어도 충무공은 충청 아산에서 성장했다.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연말연초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교학사 교과서 파동' 때 다른 지역과 달리 충청에서는 그 교과서를 채택하여 시비가 벌어진 학교가 단 한 곳도 없었다. 필자는 그 때, 든든히 아침을 먹고 논밭으로 일을 나가는 일상의 농부처럼, 그저 물병과 도시락을 어깨에 메고 태연히, 소리없이 홍구공원으로 길을 떠나던 채소장수 윤봉길을 떠올렸다. 저마다 물병을 하나씩 마음에 메고 살아가는 채소장수들의 충정의 성벽은 조용하되 두텁고 촘촘해 보였다. 충청에 개그맨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독립투사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은, 남을 웃기되 자신은 웃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되 표내거나 사익을 구하지 않으려는 마음 다스림, 즉 '평정심' 때문이라고 본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의 잔칫상에 물병 던지는 일은 언론의 사명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정치인과 합리적이지 못한 정책과 불통의 벽을 높이 쌓는 지역의 관료들을 향해, 언론이 평정의 마음으로 물병 던지는 채소장수가 되어 주기를 감히 기대한다. 언론보도가 외려 불공정하다거나 관청과 유착되어 있다는 이유로 물병 세례를 받는 일만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물병 던진 채소장수의 후예들이 저마다 마음에 물병 하나씩을 메고 살아가는 평정심의 지역일진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2.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3.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4.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5. [사진뉴스] 한밭사랑봉사단, 중증장애인·독거노인 초청 가을 나들이
  1. [WHY이슈현장] 존폐 위기 자율방범대…대전 청년 대원 늘리기 나섰다
  2. 충청권 소방거점 '119복합타운' 본격 활동 시작
  3. [사설] '용산초 가해 학부모' 기소가 뜻하는 것
  4. [사이언스칼럼] 탄소중립을 향한 K-과학의 저력(底力)
  5. [국감자료] 임용 1년 내 그만둔 교원, 충청권 5년간 108명… 충남 전국서 두 번째 많아

헤드라인 뉴스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충청권 소방 거점 역할을 하게 될 '119복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다. 충남소방본부는 24일 김태흠 지사와 김돈곤 청양군수, 주민 등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9복합타운 준공식을 개최했다. 119복합타운은 도 소방본부 산하 소방 기관 이전 및 시설 보강 필요성과 집중화를 통한 시너지를 위해 도비 582억 원 등 총 810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위치는 청양군 비봉면 록평리 일원이며, 부지 면적은 38만 8789㎡이다. 건축물은 화재·구조·구급 훈련센터, 생활관 등 10개, 시설물은 3개로, 연면적은 1만 7042㎡이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