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애]영어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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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애]영어에 대한 단상

[수요광장]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승인 2014-04-08 14:01
  • 신문게재 2014-04-09 17면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내 나이 스물일곱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교단에 선지도 어언 3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강단에 설 때의 떨리고 설레던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 한 시간을 강의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시선을 학생들에게 골고루 두리라고 계획했던 것을 실천하기는 커녕 학생들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허공에 대고 혼자 떠들다 나왔다는 느낌으로 허탈했던 기억 또한 부끄럽다. 또한 젊어서는 내가 아는 지식을 한 가지라도 더 알리려는 의욕으로만 가득 찼지 이로 인해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세월이 흘러 연륜이 쌓이니 이제는 학생들 표정만 봐도 강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짐작이 가고, 또 가끔 실없는 소리도 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제 좋은 강의가 꼭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고, 또 내가 맡은 영어학이나 영어 관련 과목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영어에 능통해져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 강의를 통해 많은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얻고 영어에 능통해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어디 세상 일이 그러한가? 학생 중에는 일단 영문과에 입학은 했으나 배우는 내용이 본인 기대와 달라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고, 또 괜찮으려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입학했는데 영어가 영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내 강의를 듣는 모두가 영어학이나 영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강박적 생각에 사로잡혀 학생들을 괴롭히는 어리석은 선생이 될 수는 없다.

더욱 난감한 경우는 학생이 영어학에 관심도 있고 영어를 좋아해서 잘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은 하지만 잘 안 되는 경우다. 사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잘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흔히 사용되는 캐치프레이즈 중에 '하면 된다'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 불굴의 의지로써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는 고무적인 구절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사법이나 행정고시 공부에 입문하여 7년이고 8년이고 노력하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교원 임용고시 준비로 몇 년이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자신의 적성을 알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택해서 했더라면 그 긴 고통의 세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 고통의 세월이 '성숙'을 위해 전혀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길은 찾기 위해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는가? 영어도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생각처럼 잘 안 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예컨대, 영어를 발음하기 어려운 구강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고, 선천적으로 어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영어에 능통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한다 해도 자신이 만족스러울 정도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하여 그 길을 가면 될 것이다. 학생 중에 영어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해 오는 경우가 있다. 한참 상담하다 보면 간혹 그 학생의 타고난 적성을 발견하게 되어 전과를 권하거나, 아니면 학부를 마치고 새로운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나 “교수님 덕분에 제게 맞는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라거나,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써먹지는 못하지만 지금 일이 정말 좋아요. 교수님, 감사합니다”라는 등의 제자들 소식을 들을 때면 진정 선생으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니, '하면 된다.'는 조건부로 사용해야 하는 캐치프레이즈다. '어느 정도 적성에 맞는 경우에는, 하면 된다'로 말이다.

영어를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을 괴롭히는 요소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어에 대한 범국가적인 자세-누구나 영어를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영어에 대한 사교육의 열기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 막대한 교육비를 지불해야 하는 영어 유치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고가의 영어 교재가 횡행할 뿐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아이에게 모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치는 부모들도 있다. 취업을 할 때에 대기업은 물론이요, 웬만한 중소기업에서도 지원자들에게 토익점수를 요구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영어를 필요로 하는 업무나 직종에 종사하는가? 그리고 그 필요한 정도는 어느 만큼일까? 과연 이렇게 온 국민이 아우성을 칠 정도로 영어가 우리 모두에게 필수일까? 영어교육에 대한 불필요한 과열은 영어를 못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우리 학생들을 옥죄고 있다.

맹목적인 영어숭배와 '하면 된다'는 희망고문이 우리 학생들을 좌절의 코너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나는 그들이 자기 적성을 파악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영어가 아닌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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