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규석 한국폴리텍Ⅳ대학장 |
알고 보면 기술은 사회 경제적 활동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전자기술 발전에 획기적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지난 1960년대 이후 신기술과 산업자본의 결합, 1980년대의 정보화 사회의 대두 등에 의한 것이며, 새로운 기술이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견인차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를 빛나게 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인문학이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도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ICT 시장을 석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활에 편리하고 실용감각도 좋은 ICT 제품은 기술의 개가인 동시에 인문학적 감성이 결합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출발한 구글이 무인자동차 개발에 들어가고 로봇기업을 인수한 것도 ICT 기술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은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일찍이 과학기술을 인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 하버드 총장을 지낸 제임스 코난트다. 그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군수용 기술과학이 평화적으로 이용되어 한다고 생각했고, 과학계와 경제계의 교류, 학제 간 교차연구가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과학기술이 실험실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과학은 인간 활동이고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쉽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과학부에 속해있던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인문학부로 끌어올리고 하버드 실험과학 사례사를 편찬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 때 등장한 학자가 토머스 쿤이다. 그는 제임스 코난트 총장을 도와서 과학사를 편찬하는 조교로서 작업을 진행했으며, 20년 후 그 결실은 패러다임으로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저서로 나타났다.
토머스 쿤이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패러다임이란 개념은 그것이 뜻하는 바가 20여 가지가 넘지만 정작 자연과학보다 인문 사회과학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과학기술사는 특정한 개인의 성공보다도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미친 결과에 큰 의미를 둔다. 토머스 쿤의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스티브 잡스 개인의 성공보다도 ICT 기술에 인문학적 감성을 접목시켜 일으킨 IT 혁명을 더 중요하게 보았을 법하다.
이제 바야흐로 모든 산업이 인간의 창의성과 기술의 융합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창의성과 인문학적 상상력은 10년 뒤에 구글과 애플이 로봇산업, 무인자동차 산업에서 경쟁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ICT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미적 감각, 실용감각 등 정서적 측면을 결합시켜야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인문학을 더욱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학은 그 정반대이다. 취업률에 목을 맨 탓에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소외당하고 있다. 철학과 민속학, 어학 등의 학과폐지가 각 대학에서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문, 사, 철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교육시키는 데 필요한 과목들이지만 학령인구의 감소, 낮은 취업률로 인하여 인문학의 통폐합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기술과학의 발전과 비례하여 인문학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지만, 정작 학문의 본산인 대학에서 외면당한다면 그 인문학적 상상력의 결핍을 어떻게 메워 나갈 것인가. 최근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MIT 대학의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류 맥아피의 저서 '제2의 기계시대'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지성에 근접하는 기계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창조적 가치를 지닌 감성적 인간'이라는 역설 속에서 인문학적 가치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문과와 이과의 인위적인 구분도 이제는 불필요하다. 인문학이 대학 담장을 걸어 나와 산업 현장의 기술변화에 맞춰 기술과학을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인문학을 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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