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변호사 |
지난 2011년 9월 말께 나는 서울에서 살다가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 전까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모 증권회사 법무팀에서 사내변호사로 6년가량 근무하다가 대전에서 변호사로 개업을 하면서 내려오게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대구이고,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에 대전은 연고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낯선 곳이었다.
사무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출문제로 모 은행 차장을 만나 상담을 하던 중 우연히 대학 1학년 때 같이 하숙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 한 누나가 당시 그 은행에 다녔던 것이 생각이 났다. 평소에도 가끔씩 그 누나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던 터였다. 아마도 나는 여자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사촌들도 전부 남자만 있는, 여자가 귀한 집안이었다) 그 누나를 친누나처럼 따랐던 것 같다. 그래서 하숙하던 시절 그리고 그 하숙집을 나와서도 한참동안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추억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후로 군대를 갔기 때문에 그 누나와 소식이 끊긴 지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그 차장님에게 그 누나 이름을 대며 혹시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회사에서는 퇴사자 명단과 연락처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 그 누나가 그 은행에서 퇴사했다고 하더라도 연락처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은행 직원 대답은 그 누나를 며칠 전에도 만났고, 대전에서 아직도 모 지점에서 업무팀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 누나는 같이 하숙할 당시 서울 명동에 있는 본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나의 이름은 너무나 흔한 성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은행 직원을 통해 몇 년도에 어디서 하숙을 한 사실이 있는지, 나를 아는지 등을 먼저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그 누나가 맞았다. 은행 직원과의 상담을 끝내고 나는 곧바로 그 누나를 만나러 반가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불가에는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무진장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바로 옆에 두고도 만날 수 없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절인연이라고 하더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을 평소에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비록 그 사람이 내 주위에 가까이 있어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대출 상담할 때 그 누나를 생각해내지 못했다면,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라도 그 누나를 아느냐고 그 차장님께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 그 누나를 만날 수 있었을까?
변호사라는 직업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사람들과 크고 작은 인연들을 엮어가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화분에 물을 주듯이 정성들여 가꾸어 나간다면 비록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고 그 인연이 단절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내가 하숙집 시절 그 누나를 여기 낯선 곳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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