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묵 국제라이온스 356-B지구 총재, 대전·충남 경영자 총협회장 |
이날 강서구민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진 황금자 할머니는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나 길을 가다가 열세 살 때에 일본순사에게 잡혀 흥남의 유리공장에서 강제노역하였고, 1940년에는 간도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갖은 고초를 겪으셨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식모살이와 폐품수집으로 어렵게 살면서 여자아이를 입양했지만, 그 아이도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해 홀로 외롭게 살다 떠나신 분. 그분의 영결식이었다.
혼자 외롭게 사셨지만, 황 할머니가 떠나시는 자리에는 500여명의 시민이 나와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로 살아야만 했던 아픈 삶을 위로하기 위한 뜻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살아낸 삶이 많은 이의 귀감이 되었기에 더욱 빛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삶은 고통과 치욕이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기에 많은 이의 추앙을 받는 것일 게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은 좀 접어두고, 비록 처절한 삶을 사셨어도 이 사회의 등불이셨던 황 할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황 할머니는 1994년부터 강서구에서 거주하며, 추운 겨울에도 겉옷 하나로 견디시며 폐품 수집을 하여 모은 돈과 정부보조금을 쓰지 않고 합해 1억 원의 장학금을 내놓으셨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강서구에 내놓았던 장학금이 무려 1억 원에 달했고, 임종을 앞에 두고는 남은 재산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유서를 작성하기도 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쓰라린 상처가 있으면 본능적으로 그와 관련된 것으로부터는 격리되고자 한다. 이런 성범죄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대인기피증을 겪게 되어 세상과 등지고 외로운 삶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황 할머니 역시 예외일 수 없어 힘든 삶을 사시다가 가셨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 힘든 외로움을 봉사로 이겨내시며 사회의 등불이 되셨던 것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겪은 고통이 그리 큰 데도 복수나 질시로 삶의 도구를 삼지 않고 사랑으로 메웠으니, 그 넓은 애타정신은 가히 모든 이의 추앙을 받을 만하다. 삶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끼니를 굶고, 추위와 싸우며 아껴서 모은 돈으로 내놓은 장학금이니, 그 빛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황 할머니는 한글도 해독하지 못하셨다. 열세 살에 일본순사에 끌려갔으니 공부인들 할 수나 있었을까. 한글도 모르고 평생을 사셨지마는 자신의 손길이 닿는 것들엔 그분만의 특이한 사인을 하셨다. 무슨 기호 같은 것을 자신의 물건에다 표시하셨다. 심지어 냉장고나 김치통에도 하셨다. 이는 위안부 시절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아 가슴까지 먹먹하다.
이 같이 배움에 대한 한 때문에 끼니를 거르며 돈을 모아서 장학금으로 내놓으셨는지는 모르겠다. 추운 겨울에도 보일러를 끄고 냉방에서 견디셨고, 구청 직원이 와서 온도를 높이면, 그것을 막으며 학생들 장학금 걱정을 하셨다는 황 할머니.
여기서 우리는 진정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나는 고단하고 가난해도 나와 같은 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소망한 것이리라.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세계정세를 알지 못해 당한 것은 아닐까. 할머니의 유별난 장학금에는 배워야 한다는 그런 깊은 뜻이 숨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 가슴에 안고 산 아픔을 이기는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황금자 할머니. 일찍이 열세 살에 유리공장으로 끌려갔고, 열여섯 살부터 위안부로 갖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 아픔을 딛고 분연히 일어서서 올곧은 삶을 사시다가 가셨다. 늘 검소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애타심에서 주위에 사랑을 베푸신 분. 지난날의 조국의 역사를 되새기며 극일(克日)의 길을 스스로 찾아 행하신 분. 그러기에 모든 이의 가슴에 오래 남아 등불이 되신 분. 어쩌면 황금자 할머니는 막연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구체적 삶을 보여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떠나신 것 같다.
이 세상에서의 아픈 기억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좋은 곳에 가시어 편안한 안식이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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