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반세기 전 만물박사로 통하던 양주동(梁柱東) 선생이 줄줄이 외우던 팔도의 망짜타령은 이렇게 흘렀다. '…서울사람 입어 망하고…, 경상도 사당치레 망하고…, 전라도 풍류에 망하고…, 충청도 양반자랑에 망하고….' 반세기 전 어느 술자리 담소에서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타령이었다. 갸우뚱한 좌중에게 양 박사는 주석을 달아 설명했다. '옷차림이 단정한 장점도 지나치면 안 좋고, 전통을 숭상하여 사당을 모시는 건 좋으나 겉치레는 안 좋고, 예술적 감흥은 좋으나 지나치면 안 좋고, 품격을 지키는 것은 좋으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장은 안 좋다는 거지…. 허허!'
전통문화를 공부하면서 '전통 밥상의 품격'에는 놀라운 예술이 있고 높은 수준의 과학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우선 '밥상(진짓상)의 품격'만 보아도 참으로 오묘하고 멋지다. 일본의 화식(和食)이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자랑하지만 '한국의 밥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선 한민족의 음식문화는 다른 민족과 달리 밥과 반찬이 따로 있어 이것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맛을 음미한다. 다른 민족은 거의가 한 가지씩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킨 다음에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 그러므로 외국의 식당에서 양 볼이 두둑하도록 집어넣고 굴리며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밥 한 숟가락 떠 넣고 씹으면서 입안에 공간이 생기면 반찬 조금 집어넣고 씹다가 잘 부수어진 일부를 삼키고 국 국물 한 숟가락 집어넣어 입안을 헹궈 넘긴다. 반찬을 이것저것 함께 섞는 경우도 있고 먹는 순서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반찬에 따라서도 다르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식자재(양념 따위 포함)소재도 다양하고, 데치고 지지고 볶고 굽고 삶고 찌고 우리고… 조리 방법도 다르고, 상차림의 법도도 다르다. 온 입안에 여러 맛을 섞어 넣고 레미콘 양회 버무리듯 굴리며 혀와 이와 잇몸과 볼 안 구석구석에서 온갖 맛을 종합해 음미한다. 이토록 다양하고 철저히 개성화한 음식문화가 세계 어디에 있단 말인가.
흔히 음식문화의 발달 단계를 ①굶주림시대 ②포식시대 ③유행시대 ④개성시대의 네 단계로 구분하며 '개성시대'를 숲이 이루는 '극상림'(極相林)처럼 음식문화의 극치로 보고 있다. 첫 단계인 굶주림시대는 전쟁을 겪거나 재난을 당한 경우 어쩔 수 없이 맞는다. 그리고 주거와 소득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굶주렸던 한'을 풀고자 포식을 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좋다더라'는 소문 따라 우왕좌왕 휩쓸린다. 이것저것 먹다가 깨닫고 '각자의 개성 따라 맛과 안전과 품위 있는 나만의 음식'을 찾아 개성시대에 들어서서 건강과 품격을 지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굶주림의 시대를 겪은 서구 선진국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개성시대에 들어섰다. 그들이 밟은 단계를 참고로 한국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면 6·25전란 시기의 굶주림시대에서 77년부터 포식시대, 80년대 초부터 유행시대에 들어섰다. 한사람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은 90년대 중반부터는 개성시대에 들어섰어야 하는데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개성시대에 들어섰어야할 우리 음식문화는 품격에 대한 체험도 공부도 의지도 없는 탓인지 '포식과 유행'의 늪에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다. 개성화가 정착한 세계 곳곳의 더욱 차원 높은 음식문화를 위한 노력을 눈여겨 봐야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지켜온 '충청도 진짓상문화'가 한국의 음식문화를 선도하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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