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사진> 국회사무총장이 생애 처음으로 썼다는 책이 출간도 되기전에 화제가 되고 있다. 2010년 8월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성공적인 회동을 위해 밀사로 활약한 부분은 정권재창출이라는 물줄기를 이뤘다는 평가다. 기자로서 정치인으로서의 소회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선친인 정석모 장관에 대한 기억, 지방선거 대한 입장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국회 사무총장으로 와서 생명사다리운동을 전개했다. 사다리라는 의미는 위와 아래, 좌우, 지방과 서울,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는 의미다. 15년 기자생활과 15년 정치인 생활을 했다. 기자생활 15년도 결국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고, 정치도 국민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민심을 대변해서 정책에 반영하는 연결고리를 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고 생각했다.
-책 내용 중에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회동을 주선한 것이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비화들인데 부담감은 없었나.
▲당시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극적인 회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정권 재창출의 초석을 다진 것이 정무수석 때 한 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정권재창출이라는 임무를 완수했다는데 자부심을 갖는다.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연결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정치는 얼굴이 부각이 안되더라도 사다리 역할을 묵묵하게 하는 그런 정치다. '정진석표 정치'의 상징적인 사안이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회동이었다.
-회동을 주선하면서 숨막히도록 긴장하는 모습이 책에 그대로 묘사돼 있다.
▲책 내용 그대로다. 회동이 성공하면 큰 전환점을 만들 수 있지만 실패로 끝나면 큰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 이전 다섯차례의 회동이 전부 실패했다. 여섯번째 회동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회동에 성공해야 그해 연말 예산 처리와 4대강 예산 처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고,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후반을 탄력있게 가져갈 수 있었다.
회동 추진은 청와대에서 나하고 이 대통령, 임태희 비서실장 셋만 알았다. 회동 추진의 보안을 지키기 위해 박 전 대표를 단독으로 만나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홍보수석도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홍상표 홍보수석은 회동한 다음날까지 몰랐다. 내가 청와대 춘추관에서 발표했는데 홍 수석한테 미안했다. 그 정도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JP와 작고한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이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회동을 성사시킨 것은 킹메이커 역할을 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2010년 7월 정무수석으로 들어갈 때부터 '차기는 박근혜'라고 말한 사람이다. 정무수석 자리도 이 대통령이 그냥 기용한 것이 아니었다. 박 전 대표와 상의해 기용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사전에 조율하고 상의해서 기용한 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 대통령이 임태희 비서실장을 보내 나를 천거했을 때 박 전 대표는 “정 의원이 하시겠어요”라고 말문을 뗀 후 “충청도 출신이고, 정 의원이 하겠다고 만 하면 저야 좋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난 후 연락을 받은 일이 있는가.
▲취임 후 국회 시정연설 등 몇차례 오실 때 뵌일이 있다.
-지난해 12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총회때 JP를 대하는 모습이 상당히 애틋했다.
▲오는 22일 공주 백제체육관에서 출판 기념회를 갖는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JP)가 영상메시지를 보내주시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이뻐서가 아니라 아버님하고 관계가 있어서 그러신 것 같다. 아버님보다 연배이신 JP가 일제강압시절 5년제 공주중학교(전신 공주고보)를 1년 먼저 입학하셨는데 학제가 변경되면서 졸업동기가 되셨다. 1978년도 10대 국회에 아버님이 공화당으로 처음 입후보하셨을 때 두 분의 모교인 공주중학교에서 유세를 같이 하셨다. JP가 찬조연설을 하셨는데 “정석모 동지는 바로 이 운동장에서 나와같이 공을 차면서 공부한 평생 동지”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JP가 정치입문과정에서도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95년 초에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하고 있을 때 JP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온 적이 있다. 아버님은 포틀랜드에 건너 가 JP를 찾아 뵈라고 했다. 아버님이 JP와 사전에 약조한 민자당 탈당을 결행한다는 말씀을 건네라는 부탁이었다. 그 때 김영삼 대통령(YS)은 아버님을 불러 “충청권에서는 JP 다음에 정 장관 아니냐”며 JP가 맡고 있었던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을 맡으라고 했는데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아버님이 “나는 이미 JP하고 탈당하기로 약속했는데 분부를 따를 수가 없다”고 하자 YS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아버님이 “영국에 가 있는 DJ가 반드시 정치를 재개합니다. 그러면 손을 잡을 수 있으니 이제 나를 놓아주십시오”라고 했더니 YS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 아버님은 탈당했다. 당시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아버님은 1년 이상 남은 의원직을 던졌다. 친JP계열 전국구 의원 중 아버님을 제외하고 한명도 사퇴하지 않았다. 그런 후 두분이 자민련을 창당했다.
-정치에 입문한 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다가 1995년 귀국해서 DJP연합의 성공으로 JP가 총리로 있을 때 총리실 출입을 했다. 1999년 아버님이 쓰러지신 직후 JP가 부르더니 “아버지 대신 나가야 되겠다”고 말해 그해 가을 신문사를 나왔다. JP특보로 활동하다 그 해 겨울 공주ㆍ연기 지구당 개편대회를 한 후 이듬해 공주ㆍ연기 지역구 총선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선친인 정석모 장관은 1970년대 두번이나 충남지사를 역임했다. 어떤 분이었나.
▲아버님은 사랑받는 도지사이셨다.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늘 말씀을 절제하셨다. 저한테도 “정치를 할 때 하고싶은 말의 100%, 120% 하지마라. 60%, 70%만해도 충분히 네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셨다. 참고, 인내하고, 절제하는 그런 삶을 사셨다. 아버님처럼 사랑받는 도지사가 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충청권 정당이 사라진 후 갈증을 느끼는 지역민들이 적지 않다. 충청정치세력의 결집에 대한 목소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자민련에서 국회의원을 했고, 심대평 대표와 국민중심당도 창당해 최고위원과 원내대표도 맡아봤다. 그러나 JP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없이는 지역당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3김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더 이상은 지역당이 나오기 힘들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영ㆍ호남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만 전국 정당이 됐다. 이제는 선진당과 합당한 새누리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JP가 잘나가던 시절에도 충청권에서 50% 이상의 지지율을 받지 못했다. 충청권은 냉정할 정도로 표쏠림없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지역이다. 결국은 충청권이 국가의 미래를 가르고 영ㆍ호남 패권구도 속에서 갈수록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본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충청권표로 당선됐다고 생각한다. 6월 지방선거 역시 '친노 도지사'냐 '친박 도지사'냐의 프레임에 의한 선택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충남도지사 출마 결심은 한 것인가.
▲2월 국회가 남아있어 책임을 다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한다. 출마를 한다면 그동안 좋은 말씀을 주신 분들께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마음을 정리하는 단계다.
-충남행정이 나아갈 방향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고려대 후배이기도 한 안희정 충남지사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다.
▲충남은 누가보더라도 큰 전환점에 서있다. 엄중한 이 시점을 기회로 발전시킬 것이냐, 위기로 끝낼 것이냐의 문제인데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통합의 리더십이다. 구호나 말보다는 또 추상적인 제시보다는 구체적인 액션플랜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내포신도시는 도청과 충남경찰청, 충남교육청 3개청사 이전한 것외에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내포신도시를 도시답게 건설해야 하는데 재정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 재정분권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결국 중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지금 충남에 필요한 사람은 현 정부와 호흡을 잘맞출 수 있는 사람, 재정을 끌고 올 수 있고, 유리한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도자다. 안 지사는 말과 연설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실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나는 그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다. 기자로서나 정치인으로서 삶의 궤적 전체를 봐줬으면 한다. 말보다는 삶의 궤적, 행동궤적이 판단 준거가 돼야 한다.
-좌우명은 어떤 것인가.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나 철학은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남들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는다는 뜻인데 나는 여야로부터도 적이 없다. 사무총장 인준도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내 얼굴은 부각시키지 않지만 사다리 역할로써 화합시키고, 통합시키고, 조율하고, 통섭하는 소질이 있다. 그것도 충청도 기질에서 비롯된 것 같다. 충청도가 중심을 잡는 중용의 도를 지키지 않는가.
대담=김대중 서울본부(부국장)
●정진석 국회사무총장은
1960년 공주에서 6선 국회의원이자 충남지사ㆍ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정석모 의원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동고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정치부기자와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1999년 자민련 명예총재 특보로 정치에 입문해으며, 이듬해 16대 총선에 선친의 지역구인 공주ㆍ연기 지역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05년 17대 보궐선거로 재선에 성공한 뒤 심대평 전 충남지사와 함께 자민련을 탈당한 후 국민중심당을 창당해 최고위원과 원내대표를 지냈다.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3선 의원으로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수행하던 중 2010년 7월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발탁됐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서울 중구에서 출마했으나 석패한 후 지난해 1월부터 국회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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