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준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과장 |
아빠의 비석 앞에서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남매가 병아리처럼 앉아 있다. 어린 누나가 동생을 나무라고 있다. 동생이 엎지른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면 아빠가 춥다며 야단이다. 아직은 앳된 미망인이 말없이 남매를 바라보고 있다. 아빠를 보고싶다고 울지 않는 아이들,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는 수십 년째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고 있다. 받는 사람 이름은 '사랑하는 아들'. 생전에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아들이 떠나간 후에야 속내를 내보인다. 편지가 한 통, 두 통 쌓일 때마다 아버지의 그리움은 더 깊어간다. 이다음에 세월이 많이 흘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 행여 아들이 몰라볼까봐 제일 걱정이라며 몰래 눈물을 훔친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은 평생을 죄지은 심정으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연못가에 잠시 서 본다. 심란한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던졌더니 돌멩이는 두꺼운 얼음 위를 몇 번 통통 튀다가 이내 멈춘다. 연못은 차갑게 식어버린 돌덩이를 품기엔 너무 가슴이 시렸나 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가 흘린 눈물이 연못 한가득 서럽게 꽁꽁 얼어붙었다.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그들은 뒤늦은 후회를 한다.
며칠 후면 설날이다. 모처럼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못다한 이야기 꽃을 피울 때 우리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가족은 차디찬 비석 앞에 꽃 한 송이 바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행복하다면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의 행복을 잠시 접어둔 고마운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꼭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 아니었을까? 지금 자신이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이 일을 가능하도록 밑거름이 되어 준 분들을 떠올릴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보훈정신 아닐까?
지난 1월 17일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제1차 국가보훈위원회를 개최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추진할 '명예로운 보훈 5개년 계획'을 심의ㆍ확정했다. 명예로운 보훈 5개년 계획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예우 강화, 복지시책 확대, 정부 주도의 공훈선양 활성화, 범정부적 나라사랑 교육 실시, 제대군인 일자리 5만 개 확보 등을 골자로 하는 명예로운 보훈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이라 할 수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참전명예수당과 무공영예수당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실질적 보상을 강화하고, 보훈병원 병상을 기존 800개에서 1400개로 확대하며 경기도 남양주에 보훈요양원을 건립하는 등 고령 또는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유공자에게 질 높은 의료 및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아울러 정부 주도로 6·25참전유공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훈·포장을 수여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또 이분들의 희생으로 일구어낸 우리나라를 더 튼튼히 지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국민들의 나라사랑 하는 마음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정부 부처가 함께 나서서 공직자와 공공기관 및 유관기관 임직원의 교육 계획에 나라사랑 교육을 포함하는 등 범정부적으로 나라사랑 교육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국가유공자 고령화로 안장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에 대비해 경기북부 또는 강원권에 제 3현충원을 건립하는 방안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제1차 국가보훈위원회에서 확정된 명예로운 보훈 5개년 계획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며, 아울러 이분들이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영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