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애]지켜야 할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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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애]지켜야 할 약속

[수요광장]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승인 2014-01-28 16:20
  • 신문게재 2014-01-29 17면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젊어서 부모님 날개 밑에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나대던 시절에는 인생의 모든 불행이 나만을 비껴 갈 줄 알았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또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어른을 모시고 살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고, 인생살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원하지 않아도 당해야 하는 크고 작은 억울한 일, 불행한 일들이 파도처럼 오고 또 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어릴 적부터 지병이 있었던 아들아이의 병세가 악화되어 골수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것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의 절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큰딸아이의 골수가 맞아 이식을 하긴 했으나, 이식 후의 회복과정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병원에서의 무균실 생활도 무척 힘들었지만 퇴원 이후 아직 면역체계가 형성되지 않은 아이의 의식주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 무균식 내지 저균식을 준비하고, 주변을 청결히 하기 위해 아이가 접촉하는 모든 물건들을 늘 소독하고, 아이와 접하는 주변 사람들은 항상 청결에 유념해야 하는 등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마음 졸이는 나날들이었다.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나면서 아이의 면역력은 차차 회복되어 갔고 그에 따라 신경 써야 할 일들도 하나 둘씩 줄어들었다.

일 년간의 휴학 후 아이가 학교로 복학하게 되어 다니던 미국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 노심초사 아이의 건강을 걱정했던 나는 결국 학교에 연구년 신청을 해 아이를 쫓아 미국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말이 연구년이지 사실 진짜 목적은 아이의 건강을 돌보는 것임은 말하나마나였다. 물론 나에게는 아들 아이 말고도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남편도 있고 딸아이도 있고. 그러나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내 머리 속의 모든 생각은 아이의 건강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나의 결심에 그 누구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8개월간의 미국 생활 동안 홀로 아이를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구년을 허락받아 방문 연구교수로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일원이 되었으니 연구도 수행해야 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는 모든 시간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고 좋은 음식을 해서 먹이고 주변을 청결히 해 주는 일, 나아가서 우울해 하는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내 인생은 어째서 이렇게 늘 힘든 일로 가득 찬 것일까.

정해진 연구년 기간이 끝나,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귀국해야 했을 때, 왜 인생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지, 왜 이렇게 힘든 일만 밀려오는지, 신세 한탄이 절로 났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마음의 반은 한국에 나머지 반은 미국에 있는 아이에게 두면서도, 바쁜 학교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무척 달라진 것이다. 나에게 과일을 깎아 주기도 하고, 내가 조금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저녁밥을 해서 주기도 하고, 설거지도 자주 했다.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와 집안 대소사 챙기랴, 두 아이 키우랴, 공부하랴, 강의하랴, 늘 동분서주하는 생활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 오랜 세월동안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아,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도 100% 불행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완벽하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불행이란 놈이 늘 달고 다니는 작은 행복이 어딘가에 숨어 있구나.

내가 영어 선생이다 보니 오래 전 학부 때 배운 영시 몇 구절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이라는 시 속에 내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되새기는 구절이 있다. “…내가 자기 숲에 눈 쌓이는 걸 보려고/여기 서 있음을 알지 못하리(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중략)…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But I have promises to keep,/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우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 때로는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서 아름다운 눈 오는 저녁 숲 속에 잠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켜야 할 약속, 생명의 약속, 내 삶을 사랑하면서 꿋꿋하게 살아야 하는 약속이 있다. 불행과 역경 속에 숨어 은밀하게 빛나는 금쪽같은 행복을 찾아내어 보다 더 성숙해 돌아온 나 자신을 반겨야 하기에, 나는 잠들기 전에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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