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관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
앞의 작품은 지난 1950년대 말, 뉴욕에서 이름을 날렸던 한 미술가와 그의 조수의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새로운 미술사조 혹은 새로운 세대와 이로부터 밀려나야 하는 기존 사조 또는 구세대의 격돌을 그렸다.
만고의 이치인가. 장강의 뒷물은 앞 물을 밀어내는 법이다(長江後浪推前浪). 뒤의 작품은 스물여덟에 만나 하룻밤 사고(?)를 치고 격렬한 말다툼 끝에 헤어진 남녀가 10년의 공백 끝에 여성 편력에 이혼 소송 중인 소설가와,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하는 리포터로 우연히 다시 만나 똑같은 말다툼과 사고를 치는 모습의 연애담이다.
그 중 '소설에서 미사여구를 제거하니 서사(敍事)가 보인다'는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이를 '삶도 세월의 굴곡에 걸러지면 판타지는 제거되고 상처뿐인 역사가 남는가' 하는 나름의 해석을 해봤다.
공연을 자주 봐야 하고 그중에서 옥석을 가려야 하는 것이 직업이긴 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나면 기분도 따라서 올라간다. 쉼 없이 밀려드는 '뒷물(후배들)'에 밀리지 않기 위한 '앞 물'의 발버둥이라 해도 이 순간이 주는 재미는 쏠쏠하다. '앙상한 역사만 남는' 삶을 피하고자 하는 가상한 노력쯤으로 봐줘도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고 학습한다는 건 이런 과정에서의 행복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문화적 혹은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자 하는 행위라도 말이다. 허영심이란 본래 좋지 않은 단어지만 지적 허영심, 문화적 허영심은 예외다.
조금 딱딱하더라도 이 대목에서 예술의 기능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예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순기능을 필자의 경험이나 학습을 토대로 정리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술 감상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상상력, 창의성, 행복감, 위안 같은 것이다. 어떤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해독능력(literacy)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예술의 기능을 우리는 '내부효과'라고 부를 수 있겠다. 대전시가 '사회적 자본'이라는 정책에서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의 신뢰, 배려, 참여, 나눔, 소통 같은 덕목도 예술의 내부효과를 통해서 더 효과적으로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외부효과'라고 넓게 칭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이 주는 경제적 유발 효과라든가, 예술 자체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예술을 도시나 국가의 경영이나 마케팅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외부효과를 위해 도시마다 관광축제를 열고, 문화산업에 투자하고, 문화도시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하는 것이다.
실상은 외부효과라 하는 것들도 내부효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내부효과부터 챙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후자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국 같은 나라가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 연극놀이 같은 예술교육을 탄탄하게 하고 이런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이른 바 창조산업의 주역이 되게 하는 정책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내부효과를 소홀히 하고 관광축제, 문화산업, 문화도시 등의 이름으로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여 빠른 시간 안에 뭔가 이룬다 하더라도 결국 사상누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면 끔찍한 일이다.
다행히 우리 대전은 그동안 내부효과 진작을 위한 기본 투자를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대전예술의전당, 시립예술단, 대전 원도심의 소극장, 그리고 크고 작은 공연장으로 행복한 나들이를 해보는 것은 예술의 내부효과를 탄탄하게 경험하는 것이리라. 올해의 괜찮은 프로그램들도 이미 공개가 되었다. 스스로 찾아보고 계획을 세워서 예술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부나 권력보다도, 예술과 함께하는 행복감에서 밀린다면 얼마나 삭막한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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