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연 변호사 |
제1차 세계대전은 왜 발발했을까.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욕과 경쟁이 주된 원인으로, 전조증상은 수년전부터 있었다. 독일은 연방제로 있다가 지난 1871년에 단일국가로 통일되면서 국력이 급성장했다. 그런 후에 세계로 눈을 돌려보니 이미 지구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기존 강대국들이 분할하여 나누어 가진 상태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조바심을 낸 독일은 틈만 나면 식민지를 나누어 달라며 기존 강대국들과 수시로 트러블을 만들어냈다. 먼저, 아프리카의 모로코 사태를 야기시켰다. 이곳에는 일찌감치 프랑스 세력이 침투해 있었고 영국도 이를 묵인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독일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에 가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하면서 프랑스의 우선적 이익을 부정하였다(1904년).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양국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가장 강대국이었던 영국이 프랑스의 편을 들면서 결국은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1912년). 독일국민의 영·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발칸반도에 있었다. 반도 주변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러시아가 있었고, 내부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약속국들이 산재하면서 독일을 맹주로 하는 게르만족과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슬라브족들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원래 발칸반도의 지배자는 오스만 투르크였는데 그 힘이 쇠퇴하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계열의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 지역을 합병해 버림으로써(1908년), 평소에 이곳을 희망하던 세르비아는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곧이어 세르비아 등 슬라브 계열 발칸동맹국 4개국이 터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 승리를 하였고(1912년), 내륙국으로 바다가 없었던 세르비아는 전리품으로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출구지역을 얻고자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이마저 좌절되었다. 연속된 오스트리아의 훼방에 세르비아의 적개심은 극에 달하였고,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감정 역시 전통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민족적 감정 상태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가 세르비아 계열의 청년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슬라브 계열과 세르비아의 소탕 기회로 삼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같은 게르만족인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편을, 같은 슬라브족인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게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사전 조약에 따라 러시아 쪽에서 자동 개입을 하면서 졸지에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해관계가 거의 없던 일본도 참전하였다. 당시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킨 일본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워낙 커서 후발주자에 불과한 일본이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하다가 유럽의 전쟁으로 열강의 관심도가 떨어진 틈을 이용하여 독일에 잽싸게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내에서 독일의 영향권내에 있던 칭다오(靑島)를 점령하는 등 기회주의적 야욕을 선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참담한 결과를 내고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었는데, 그 교훈은 무엇일까. 강한 나라만 살아남는다는 것이고, 제국주의는 모양만 달리할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옆에 또다른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있는데, 그 나라들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언젠가 중국은 또다시 종주국 행세를 하려 할 것이고, 일본은 영토적 야심을 다시한번 드러낼 것이다.
엊그제 아베 일본 총리가'일본과 중국은 국지전을 벌일 수도 있다'라는 호전적 발언을 하였고, 기시다 외상도'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다'라는 망언을 또다시 하였다. 일본은 기회를 보아서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독도를 기습점령할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도 이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보낼 것이고, 그러면 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이 그런 야욕을 감히 부릴 수 없도록 평소에 우리의 힘을 강하게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진짜 교훈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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