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1920년대까지도 함경도 개마고원과 그 인근에는 북방 민족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다. 열 사람 이상 스무 사람 미만의 대가족이 함께 이동하며 살았다. 그들은 가족 수보다 많은 말(馬)을 집에서 기르며 함께 살았다. 봄이 되면 산 속의 펀펀한 곳에 불을 질러 태우고 말로 밭을 일구어 곡식과 채소를 가꾸었다. 곡식은 메밀이 주였다. 추위가 오면 거둔 곡식과 채소-주로 무가 많았다-를 짐승가죽으로 만든 푸대(부대)에 넣어 말에 싣고 겨울을 날 움집으로 옮겨 갔다. 움집은 볕이 잘 드는 양지쪽 굴을 이용해 나무나 억새 따위를 얽어 임시로 지은 것이었다. 방 한 쪽에 솥이 걸린 커다란 움집 온돌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냉면을 먹으며 겨울을 났다. 눈이 쌓인 날 남자들은 사냥을 했다. 움집 앞의 긴 빨랫줄에는 꿩이나 노루다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함경도 출신 문단의 원로에게서 들은 '고향 이야기'였다.
기마민족과 말과 냉면….
두고두고 나의 우리문화에 대한 호기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말이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살던 화전민들의 삶에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 수렵도 사람들의 숨결이 스며있었을 것이다. 말과 메밀에 스며서 면면이 이어온 전통의 끈이 어른거렸다.
조선조 초기까지 만해도 말은 양반 댁의 필수 가축이었다. 말을 기르던 마구간(외양간)이나 말을 매던 말뚝의 옛 흔적을 자주 본다. 지금부터 600여 년 전인 1399년(정종 1)에 편찬된 수의학서(獸醫學書) '신편 집성 마의방 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의 분량만 봐도 98 대 20으로 말의 비중이 월등하게 크다. 국가의 통신과 교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막중한 소임을 맡았던 말은 늘 우리 삶의 동반자였다. 말타기는 활쏘기와 함께 무과 시험의 필수과목이었고 모든 선비의 기본 소양이었다. 싸움터에서 공을 세운 말, 마패를 찬 어사를 태우고 번개처럼 달리던 말, 한양 가는 선비를 태우고 고개를 넘던 말,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1920년대 윤석중의 동요)의 장에 가던 말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수단이었다. 그러나 신작로가 열리고 자동차가 늘면서 말은 우리 문화 속에 숱한 이야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는 말을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지위가 높은 총독부 관리나 헌병 또는 순사들이 지방을 순시할 때 으레 칼을 차고 키가 큰 호마를 타고 겁을 주었다. 우리 독립군과 맞싸울 때나 태평양 전쟁 때 기병들이 한몫했다. 광복 후 패전한 일본군인들이 버리고 간 호마들은 바짝 말라 채찍을 맞으며 무거운 짐수레를 끌다가 자취를 감추었으나 일부는 경찰의 시위진압 등에 활용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나라가 부해지면서 경마장을 만들고 돈 놓고 돈 먹는 판을 열었다.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 권력은 이 돈을 서로 끌어다 쓰려고 밀고 당긴다. 우리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지원하는 돈의 많은 부분도 이 돈에서 나온다.
최근 말로서 버는 돈을 말 산업을 육성하는데 쓰자고 나섰다. 골프보다 더 귀족적인 스포츠라는 승마의 대중화에도 꽤 힘을 기울이고 있다. 수입에 의존하던 명마를 직접 생산해서 길러내는 길도 열어가고 있다. 광활한 영지를 가진 서양 귀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온 양마(養馬)의 전통과 서양 부자들의 잔치인 명마 겨루기 대회, 더비(derby)의 전통까지도 도입할 기세다.
말에 대한 겨레의 향수도 이제 남의 일처럼 멀어지고 있다. 조랑말은 제주도 한구석에 갇혀있다. 서양말 육성에 쏟는 돈에서 조금 떼어서라도 '겨레와 함께 했던 조랑말'을 기억하는 작은 문화사업 한 둘 쯤 만들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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