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심 충남대 영문과 교수 |
논어에 등장하는 노()의 미생(尾生)은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다리 아래 기둥에서 기다리다 불어난 빗물에도 다리 기둥을 붙잡고 떠나지 않아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고 하여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말이 있다.
미생은 과연 융통성 없는 어리석은 사람인가? 약속을 목숨과 바꾼 훌륭한 인물인가? 많은 사람은 미생을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나는 미생의 목숨과 바꾼 여인과의 약속의 디테일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약속이란 대부분의 경우, 당사자와 외부 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남과 한 약속은 그 약속이 깨지면 작게는 감정적, 심리적 갈등을 비롯해서 크게는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법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한 결심은 남들은 모르는 수가 많고, 남에게 말했다가 내가 그 결심을 이루지 못해 깨어졌다 한들 아무런 문제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해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과의 약속, 즉 '결심'을 하게 된다. 지난해 뉴욕 타임스는 가장 많이 결심하고 가장 많이 깨어진 새해 결심리스트를 발표했는데, 1위는 단연 '살 빼고 건강한 몸매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리스트 중에는 '건강한 음식먹기', '금연하기', '금주하기', '스트레스 덜 받기' 등 건강과 관련된 항목이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은 '가족과 시간 많이 보내기', '여행하기', '봉사활동하기', '신용카드 덜 쓰기', '돈 절약하기' 등이 있다.
이러한 각종 새해 결심리스트는 2월 중순이 되면 눈 녹듯이 사라지고, 헬스센터의 등록증 중 60%가 넘는 등록증은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새해 결심리스트가 1월 한 달간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금연의 실천은 6개월이 지나면 불과 15% 이하의 사람들만이 금연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새해 결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새해 결심이란 또 깨어질지도 모른다. 새해 결심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인데, 이를 미생지신의 처절함으로 지킨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해마다 동일한 결심리스트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심조차 하지 않고 지나간 해와 결심을 단단히 하고 그리고 깨어진 채 지나간 해를 비교해 보면 그래도 결심을 하면서 지낸 한해가 좀 나은 것 같다.
어차피 깨어지는 새해 결심 리스트일지라도 작성해보자. 그리고 또한 결심항목을 조합해서 보다 실현 가능하도록 만들어보자. 결심 리스트가 우리들 자신에게 조금 더 동기를 촉발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해보자.
예를 들면 달리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냥 달리지 말고, 봉사활동과 결합된 형식의 달리기에 참가해 보자. 예컨대 '유니세프와 함께 하는 달리기'나 '대청호 주변정화 운동 걷기대회' 등이 이에 속하겠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 실천해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거나, 또는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는 인생, 또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삶은 너무 심심할 것 같다.
우리는 소위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시점이 되면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이 없어질 수도 있다. 해마다 우리에게 결심리스트가 생기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나 자신도, 2014년 새해가 되면서 건강을 위한 살빼기와 운동을 해야겠다는 것과 5~6년째 붙잡고 있는 '좋은' 논문을 완성하는 일을 새해 결심리스트에 넣었다. 이런저런 결심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나의 새해 결심리스트가 꽤 길다. 물론 내년에도 아마 동일한 새해 결심리스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생지신의 우둔함이라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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