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규석 한국폴리텍Ⅳ대학장 세 설 |
그는 카르타고 군의 우수성을 알기 때문에 한니발과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그의 군대를 포위하면서 식량과 물자를 차단하며 게릴라전을 통해서 압박하는 전술을 폈다. 그가 지연전술로 카르타고 군대를 로마에 묶어놓는 동안 로마군이 아프리카 연안의 카르타고를 침략하여 한니발은 로마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비우스에겐 지구전을 택했던 때문에 그의 이름 끝에 굼벵이를 뜻하는 쿵크타토르(cunctator)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정치에서도 파비우스처럼 준비를 철저히 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유형의 리더십을 파비우스 스타일이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前)수상의 국정운영 스타일도 면밀히 분석하면 파비우스 스타일이다. 그녀는 정책을 먼저 확정하고 그 일을 추진하는데 적합한 인물을 등용했다. 정책이 먼저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는 사람을 앉힌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정책추진은 때때로 모든 것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승부사 기질의 관료들을 통하여 이뤄냈다. 세제개편과 지출삭감을 위해서는 온갖 아수라장에서도 뒤로 물러섬이 없는 인물을 재무상으로, 노조개혁을 위해 노동상에는 노동법 전문가로, 석탄공사 사장에는 과거에 철강산업의 파업부문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을 임명하는 등 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그러나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항상 베이스캠프를 먼저 차리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을 빼놓지 않았다.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 이익집단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책을 선회하거나 정권이 무너지는 일을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에서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는 수십 차례의 점검과 분석, 회의를 통해서 면밀하게 준비하고 대안을 찾아서 점진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번 갑오년 첫 기자회견에서 박대통령은 집권 2년차 구상을 밝히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했다. 적자와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는 공기업에서 곶감 빼먹듯 하는 무분별한 운영백태와 부패로 물든 원전산업, 정치파업에 익숙한 산업계에 칼을 빼든 것이다. 공공부문의 낭비와 비리를 방치하면, 모두 민간에게 전이돼 자본주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공공부문이 문제, 그 자체가 돼서는 안 된다. 해결의 열쇠는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방법론에 달려 있다. 준비없는 접근은 정치적 대가를 지불할 위험성이 높다. 정쟁과 반대를 뚫고 가려면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이 갖춰져야 한다. 인적·법적 준비, 국민 동의, 홍보, 장관의 개별책임과 내각의 연대책임, 이 모든 것들이 갖춰져야 한다. 각 부처가 이런 준비가 없다면 개혁은 이미 익숙한 길, 해왔던 길, 가까운 길, 편리한 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그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선언적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 일단 올바른 정책이라 판단되면 길이 없을지라도 만들어서 가야하고, 제약이 있으면 돌파해야 한다. 모호한 조건으로 정책을 마무리하면 그 다음에 등장하는 정권,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꼴이 된다. 마치 4대강에 대한 국민 반대가 많다고 공기업에 재원조달을 떠넘기는 식과 같은 방법은 안 된다. 이전 정권이 추진하다 실패한 정책의 문제점도 냉정하게 진단해야 한다. 갈등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고 적절한 준비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 때 전투를 벌이는 시기조절도 필요하다.
정치의 세계는 서로 어떤 관련성도 없는 작은 사건들이 모아져서 정부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드는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전 정부와 차별화할 것은 분명한 선을 긋고 다시 추진해야 한다. 보수정권끼리는 그대로 답습해도 된다는 사고가 또 다른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
개혁을 위한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고통스런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결실을 볼 수 있다면 우리 국민들은 단기적인 희생에는 인내할 줄 안다. 개혁의 큰 자산인 국민적 인내를 얻으려면 가야할 길이 명료하게 제시되고 주도면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파비우스 스타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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