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영 공주대 경제통상학부 명예교수 |
한 여고동창 모임에서 푸념이 쏟아진다. “그 애 정숙이 말이야, 학창시절에 얼마나 연애박사고 말괄량이였니.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가더니 목에 힘주는 것 봐라. 그 애는 복이 터졌어!” 부잣집에 시집가니 복이 터진 거란다. 돈 많으면 복 있고, 돈 없으면 복 없다는 논리다. '복=돈'이라는 등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복이 뭘까. '국어사전'에서 '행복의 준말'로 풀이한다. '행복'을 다시 찾을 수밖에. '좋은 운수(good fortune) 또는 만족감을 느끼는 정신상태(happiness)'로 설명하고 있다. 뜻이 생동감 있게 와 닿지 않는다. 복(福)은 한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福'이 우리말로 표기되었을 뿐이다. 그건 갑골문(甲骨文)에서 '示+酉'으로 나타나 있다. 신(神) 앞에 가지런히 놓인 술[酒]병을 그린 모습이다. 한자 최초 자전 '설문해자(說問解字)'에서는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려 인간 소망을 채워주니 '만족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억지 해석일지 모르지만 또 다른 오묘한 뜻이 담겨있다. 복(福)은 示, 一, 口, 田의 결합이다. 밭(田)에서 경작한 곡식으로 신[示]에게 경건하게 예를 올리고 한(一) 자리에서 오순도순 먹을 수(口)만 있다면 족히 복이리라. 추수한 곡식이 몇 천 섬, 몇 만 섬이어야 복이 아니다. 신(神)에게 예(禮)를 올리고 소박하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이 복이다. 예를 올리듯 경건한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성경(마태복음5:3) 말씀이다. 여덟 가지 복 중 첫째 복이다. 물질의 풍성함이 아니라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다. 욕심 없음이다. 외형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러니 크고 작음도 헤아릴 수 없다. 저울에 달아볼 수도 없다. 다른 사람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거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내 복은 몇 말인지, 몇 ㎏인지 궁금해 한다. 다른 사람 복은 크기만 한데, 왜 내 것은 작은 걸까? 내 복이 얼마나 되기에 팔자가 사납단 말인가!
괴테(Goethe)가 75세 생일을 맞이하면서 내뱉은 인생고백을 들어 보자. “나의 삶은 노고와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행복을 끊임없이 올려놓아도 반복해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였다. 나의 75년 생애 중 진실로 행복했던 기간은 불과 4주간 정도였다.”
복이란 무게나 크기처럼 저울이나 줄자로 잴 수 없는 거다. 그러나 확률로는 측량 가능하다. 괴테의 인생고백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자. 75년 생애 중 행복했던 기간은 4주간이므로 복의 확률(P(福))은 0.0010256인 셈이다. 복된 삶의 가능성은 1000일 중에 겨우 하루라는 것이다. 즉 삼 년에 겨우 하루가 행복했다는 뜻이다. 복의 특성은 희소성이다. 희귀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리라.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씨름판이다. 행복은 힘이 약해 늘 진다. 견디다 못해 하늘로 피신한다. 땅에서 그것을 찾는 이가 많다. 제우스신이 보기에 딱했나 보다.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 보낸다. 그래서 행복은 잘 보이지 않는 거라나. 이솝이 던진 '행복론'이다. 그것도 아무 때나 보이는 게 아니다. 안녕할 때만 보인다. 행복이 하늘이라면 안녕은 땅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이달 초 한 대학 캠퍼스에 붙은 대자보 제목이다. 사이버 세상에선 사이비가 판쳐서일까. 먹통과 불통으로 숨통 막혀서일까. 아날로그 손 글씨가 일파만파다. 디지털로 빼앗긴 감성이 용트림한다. 대부분 안녕 못했단다.
'국민행복 시대'가 열린다고 했는데, 안녕도 못했으니…. 집에서나마 안녕했으면 좋으련만…. 중도일보 애독자님들, 올 한해 '행복들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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