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에 다니는 선배가 모교를 방문해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주로 공부 잘하는 방법들에 관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서울대만 가면 과외를 해서 혼자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는 그 한마디만 내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이 내게는 빛과 같았다. 나 혼자 힘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다는 희망과 공부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선배 덕분에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골 학교에서 내 동기들이 서울대에 8명이나 진학한 것을 보면 우리 졸업과 함께 정년퇴임을 하신 교장 선생님의 열정도 서울대 진학에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대학에 다니면서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졸업하던 그 해에 고등학교 동기 중 한 명이 군대를 마치고 다시 시험을 쳐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입학과 졸업을 서로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만난 그 친구를 보면서 뒤늦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그 친구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친구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전에도 누군가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누군가는 판사가 되었지만 그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는 그 누군가에 불과했는데 그 친구가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나의 문제가 되었고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판사의 꿈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표를 던지고 사법시험에 뛰어 들었다. 아마도 2년 동안 공부하는 내내 앞서 판사의 길을 가고 있는 그 친구와의 경쟁심이 힘든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집안 형편이 좋아서 대전이나 다른 곳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과연 내가 서울대에 갈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선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교장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과감한 도전으로 나보다 앞서 판사의 길을 갔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지금 판사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로서는 '내가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예비된 학교는 나에게 최선의 학교'였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내가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켜왔다. '만남'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내가 원하는 곳에 서 있지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원하지 않던 곳이지만 뜻밖의 인연을 만나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곳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과 내가 있어야 할 시기는 내가 원하는 그 곳이나 내가 원하는 그 시기와 다를 수 있다.
지금 대입 수시가 거의 마무리 되고 정시 준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그 힘이 예비한 다른 곳에서 나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최선의 결과를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지금 원하는 곳에 가는 것보다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내가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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