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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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혁]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시간에

[시사 에세이]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승인 2013-12-16 16:37
  • 신문게재 2013-12-17 16면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시골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전이나 공주, 천안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집에서 버스로 통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그리 좋은 학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농업고등학교였고 종합고등학교를 거쳐 인문계 고등학교로 바뀐 지도 얼마 되지 않은 학교였으니 그도 그럴 법하다. 다들 유학을 떠났는데 나만 시골에 남아 공부를 하려니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도 마음대로 진학하지 못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한들 대학을 다닐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공부를 멀리 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에 다니는 선배가 모교를 방문해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주로 공부 잘하는 방법들에 관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서울대만 가면 과외를 해서 혼자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는 그 한마디만 내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이 내게는 빛과 같았다. 나 혼자 힘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다는 희망과 공부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선배 덕분에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골 학교에서 내 동기들이 서울대에 8명이나 진학한 것을 보면 우리 졸업과 함께 정년퇴임을 하신 교장 선생님의 열정도 서울대 진학에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대학에 다니면서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졸업하던 그 해에 고등학교 동기 중 한 명이 군대를 마치고 다시 시험을 쳐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입학과 졸업을 서로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만난 그 친구를 보면서 뒤늦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그 친구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친구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전에도 누군가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누군가는 판사가 되었지만 그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는 그 누군가에 불과했는데 그 친구가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나의 문제가 되었고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판사의 꿈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표를 던지고 사법시험에 뛰어 들었다. 아마도 2년 동안 공부하는 내내 앞서 판사의 길을 가고 있는 그 친구와의 경쟁심이 힘든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집안 형편이 좋아서 대전이나 다른 곳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과연 내가 서울대에 갈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선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교장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과감한 도전으로 나보다 앞서 판사의 길을 갔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지금 판사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로서는 '내가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예비된 학교는 나에게 최선의 학교'였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내가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켜왔다. '만남'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내가 원하는 곳에 서 있지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원하지 않던 곳이지만 뜻밖의 인연을 만나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곳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과 내가 있어야 할 시기는 내가 원하는 그 곳이나 내가 원하는 그 시기와 다를 수 있다.

지금 대입 수시가 거의 마무리 되고 정시 준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그 힘이 예비한 다른 곳에서 나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최선의 결과를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지금 원하는 곳에 가는 것보다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내가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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