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인생 반세기의 박명규 화백은 지역작가들을 위한 풍성한 문화토양이 마련되기를 바란다며 지역의 원로 화가로서 후배작가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다. |
남녀가 만나 부부로 사는 건 불가에서는 '8000겁의 인연'에 해당한다고 한다. 겁(劫)이란 천 년에 한 번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한 바위를 뚫는 시간. 부부의 인연이 그만큼 귀하다는 이야기일텐데, 거기에 더해 부부가 동갑내기로 같은 대학을 졸업한 뒤 수십년간 함께 미술교사로 교단에 서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화가로 작품활동하다 은퇴 뒤 제자들과 작품전을 여는 일은 몇 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가능할까? 전국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작품전'이자 수십년 세월이 허락해야 일궈낼 수 있는 삶의 결실이기에 “다복(多福)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일일 것이다.
이같이 의미 깊은 '사제동행전' 전시회를 지역의 원로화가 박명규(71)ㆍ이명자(71) 화백 부부와 제자들이 가졌다. 두 사람이 중ㆍ고교 교단에서 길러낸 제자 20명이 스승을 모시고 전시회를 갖자는데 뜻을 모아 전시회를 열게 됐다.
사제동행전의 마지막 날이자 만추의 가을풍경이 멋스럽던 지난 7일 대전시 서구 둔산동 LH아트갤러리 전시회 현장에서 박명규 화백을 만났다. 반세기를 바라보는 아내와의 인연, 제자들과의 인연에 대해, 화가로서의 반세기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다.<편집자 주>
-제자들과 '귀한 전시회'를 가지신 걸 축하드립니다. 두 분이 결혼하신지 햇수로 45년째 되는 해이기에 더 의미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내는 1961년 홍익대 미대 입학동기로 만났는데 저는 추상반, 아내는 구상반이라서 대화도 거의 없었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저는 군대에 갔고 아내는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1968년 논산에서였습니다. 논산중에 미술교사로 발령났는데 이웃한 논산여중에서 아내가 미술교사로 재직중이었습니다. 우연으로 다시 이어진 인연은 이듬해 결혼이라는 매듭으로 맺어졌고 햇수로 45년째 부부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림 인생도 반세기가 넘으셨죠?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반 활동을 시작한게 그림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조각가인 최종태(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이 지도교사셨는데 그 분이 미술점수 99점을 주셨던게 미술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원래 그림 그리는 것이 좋기는 했지만 최 선생님께 '감화'를 받아서 미술에 더 빠져들게 됐으니 최 선생님이 그림인생을 열어주신 셈입니다.
-당시 그림을 그리고 미대를 간다는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1950년대 말 공주에는 화방이라고 할만한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림도구도 구하기 어려워서 목탄을 직접 만들어 썼을 정도죠. 미루나무와 버드나무를 장작불에 구우면 숯이 됐는데 그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삼촌과 형님 같은 집안식구들은 법대와 상대를 전공했으니 당시 부모님의 입장에서 미대를 보내주신 건 무척 파격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두 아드님도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죠?
▲ 지난 7일 '사제동행전'이 열린 대전시 서구 둔산동 LH아트갤러리에서 함께 한 박명규-이명자 화백 부부. 사진촬영을 한사코 사양하는 아내 이명자 화백에게 "신문에는 아주 조그맣게 실릴 것"이라고 설득, 귀한 한컷을 얻어낼 수 있었다. |
-지역의 원로작가로서 젊은 작가들을 위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예전에 비하면 대전의 문화환경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1970년대 대전에 전시장이 4~5개였던데 비하면 지금은 40~50개로 크게 늘었습니다. 대전문화재단의 지원도 적지 않은 편이지만 여전히 아쉬운건,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이 없습니다. 젊은 작가들이 전시회를 가지려면 적어도 전시회 경비 정도는 나와야 그림을 그릴 활력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시민들이 전시회도 보고 공연장도 찾으며 문화 향유를 생활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이 어렵다고 하는데, 무언가를 좋아하는데는 뜻이 없습니다. 본인이 보고 좋으면 되는겁니다. 집안에 큰 오디오, 대형 냉장고가 있다고 자랑하며 좋아할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 작은 그림이라도, 순수예술작품을 들여놓을 수 있는 풍토가 자리잡길 바랍니다.
-지역의 원로 화가시다보니 '초대' 타이틀이 적지 않습니다. 2010년 창립한 조형미술협회의 초대회장이었고 1989년 대전과 충남이 분리되면서 한국미협대전시지부 초대지부장도 맡으셨었죠?
▲문화예술단체 회장을 하면서 솔직히 말하면 고생만 하고 욕도 먹었지만(웃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미협지부장을 할 때는 한밭예술제 참여작가들에게 사비를 털어서 거마비를 주기도 했습니다. 크지 않은 돈이었지만, 참여작가에 대한 나름의 예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시회를 열면 지금도 작가가 전시장까지 직접 작품을 운반합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배려받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습니다.
-미술교사로서도 열정적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사로 재직시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면요
▲조치원여중 근무당시 제자 한명의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 중 2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당시 쌀을 갖고 제자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그 제자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전국 미술실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네 번이나 타서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988년 중등교단에서 퇴직 후 지역 대학에서 강사로 후학을 양성하셨고 은퇴 뒤에도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하셨는데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지금도 중촌동 20평짜리 작업실에서 작업합니다. 건강을 지키며 꾸준히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제자들의 말을 빌리면 “연세에 비해 열정적으로 작업한다”는 박 화백은 사제 동행전에 이어 다음날인 8일부터 18일까지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한국조형미술협회 주최로 LH아트갤러리에서 여섯번째 이웃돕기 소품전을 갖는다.)
한편 이날 전시장에 함께 한 아내 이명자 화백에게 부부가 함께 미술교사로, 화가로 활동해온데 대해 묻자 이 화백은 “남편은 추상, 본인은 구상으로 작품세계가 다르다 보니 그림을 놓고 의견차를 보일 때도 있지만 함께 그림을 그리기에 남편이 힘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 다시 태어나도 부부로 만나시겠느냐?”는 물음에 이 화백은 “아니다”고 답해 옆에 있던 제자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술을 많이 마셔서 밉다”는 아내의 말 속에는 남편에 대한 반세기 속깊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남편과 아내, 제자의 인연으로 만나 그림으로 하나된 이들의 환한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피천득 님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대담ㆍ정리=김의화 부장(문화독자부)ㆍ사진=우창희 부장
한국조형미술협회 이사장 등 왕성한 활동… ‘노익장'과시
●박명규 화백은
▲ 박명규 작 ‘한국의 얼’ 53X45.5cm/Acrylic |
국전 6년 연속 입선 ‘화제’… 지역 여류작가들의 왕언니
●이명자 화백은
▲ 이명자 작 ‘민수와 준수’ 45.5X37.9cm/Oil on Canv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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