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가요, 손이 가~'
원치 않아도 자주 듣게 된 어느 광고의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처럼 어느덧 자주 손이 가는 물건(효자손)이 책상 가까운 곳에 이동해 있다. 24절기로 된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을 지나고 다음달 7일에 입동을 앞두고 있으니 피부가 자주 가렵다. 이쯤 되면 대표적으로 가고 싶은 곳이 온천(溫泉)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대전지역의 온천은 단연코 유성온천이다. 유성온천의 기록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등장하며 역대 몇 임금이 유성 온정(溫井)에 행차한 기사가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현의 동쪽 5리 독지울(獨只于乙-우리말 지명을 한자표기)에서 따뜻한 물이 솟는다는 기록이 있으니 유성온천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 온천이 대중적으로 개발된 시기는 일제강점기 철도개통과 함께 진행되었다. 당시 대전인구의 절반인 일본인들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생활습관에서 더 필요했을 것이다. 1907년 스즈키(鈴木松吉)가 첫 온천개발을 시작해 1913년 온천영업(온천탕)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1932년 충남도청의 대전이전과 함께 공주갑부 김갑순에 의해 유성온천장이 개업하며 온천타운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진 1의 지도 사진은 기념엽서를 세트로 만들어 판매하던 봉투 중 하나이다. 시내에서 20분 걸리며 직통차량이 운행한다는 것이다.
사진 2는(엽서 중 부분만 오려냄)은 1930년대 후에 제작된 것이며 봉투에 광고 그대로 대전역 앞 광장 맞은편에 유성온천으로 직행하는 승용차량 두 대가 보이며 오른쪽 아래 사람은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 이층은 강점기 당시 장유(醬油)회사로 이름난 후지추 회사의 사무실로 보이며 직원 한 명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3은 유성 구(舊)온천사진(1910년대 추정)은 엽서에서 오려낸 것으로 1907년 스즈키에 의해 처음 굴착되어 완성된 온천의 욕탕으로 추정된다. 건물 사이에 온천물을 끌어 올리는 시설이 보이고 이후의 건물보다 작다. 당시 봉명관(사진 4, 5, 6)은 아주 이색적인, 아니 일본의 한 온천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건물과 정원이었음을 사진이 보여준다. 아마도 이때부터 대전 사람들은 일본식 정원을 알게 되었으며 이후 도시건설 과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객실은 다다미를 갖춘 전통 일본식 실내장식이며 현존하는 충남도지사관사의 내부와 아주 흡사하다. 욕조는 2인용이며 탈의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8년 만년장이 개장되어 근래까지 성업하며 숱한 사연을 남겼으나 현재는 리베라호텔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당시 충청도와 인연이 있었던 대부분의 결혼부부는 온천장, 만년장 입구에서 신혼여행 사진을 많이도 남기었다.
현재 유성 온천지역은 호텔과 오피스텔 등이 밀집된 상태의 관광특구이나 예전과 같은 온천여행지로의 의미는 퇴색하는 모습이며 온천수공원을 활용한 온천지역으로서의 새로운 모습은 미약하다. 단순히 지하수의 온도만 충족되면 '온천'이 라는 명칭사용이 가능한 온천법인 탓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임헌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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