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비켜갈까 하다가 조금 기다렸더니 그 차도 우회전을 하기에 따라서 우회전을 했더니 조금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안 되겠다 싶어 왼쪽으로 비켜가려고 차를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앞차가 후진을 하더니 내 차를 북 긁어버렸다. 짜증이 났지만 차 안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내렸다. 서로 시비를 가리는 게 싫어서 “각자 보험회사에 연락하죠”라고 한 마디 던지고는 바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앞차 운전자는 몇 마디 하다가 근처 다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내 차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몇 가지 확인을 하는 중에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판사로서의 직업병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사건의 내용이 뒤바뀌거나 나중에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온 탓에 보험회사 직원에게만 맡기고 그냥 지나치려니 무언가 찝찝함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당혹스러운 일을 예방하기 위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사고접수를 했다.
잠시 후 나와 앞차 운전자는 파출소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먼저 음주측정을 했다. 나야 당연히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앞차 운전자는 혈중알코올농도가 0.097이 나왔다. '그래서 그랬구나' 앞차 운전자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 조사를 받던 앞차 운전자가 경찰관에게 내 이름을 묻는다. “장동혁씨입니다” 순간 앞차 운전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동혁아, 30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이렇게 만나는구나. 미안하다.”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앞차 운전자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아… 중학교 친구.
몇 초 사이에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친구가 아니더라도 미안한 상황이 되었는데, 내가 친구를 전과자로 만들 판이다. 하지만 이미 음주측정까지 마치고 조서까지 다 작성한 뒤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책임을 지고 있는 판사지만 명절날 집에 내려와서 중학교 친구를 전과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조사를 마치고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무슨 일이냐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중학교 친구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무거운 마음은 명절 내내 이어졌다.
며칠 전 다른 중학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음주운전 했던 그 친구가 운전면허가 취소되고 직장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벌금도 적지 않게 나왔다고 했다. 회사에서 운전하는 일을 했는데 면허가 취소되다보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얼음이 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친구의 얼굴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아이들도 있을 텐데…. 운전면허 취소, 벌금, 전과자, 실직. 나 때문에 그 친구에게 너무도 가혹한 상황이 오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판결했던 피고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도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였을 것이다. 내가 내린 판결로 인해서 보이는 형벌 말고도 보이지 않는 형벌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피고인들도 있을 것이다. 음주운전 사건은 판사가 접하는 사건 중 아주 경미한 사건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피고인에게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사건이고, 판결문에 쓰인 형벌 외에도 보이지 않는 형벌이 가해진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친구야, 미안해. 그래도 이 번 일이 더 큰 일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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