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친구야, 미안해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장동혁]친구야, 미안해

[시사 에세이]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승인 2013-10-21 16:10
  • 신문게재 2013-10-22 16면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 장동혁 대전지방법원 판사
지난 추석 명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딸아이가 고3인지라 초등학생인 아들과 나만 둘이서 시골에 내려갔다. 퇴근해서 이것저것 챙기고 나니 저녁 9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갈까 고민하다가 기다리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집을 나섰다. 시간도 늦은데다 시골길이라 운전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시골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우회전을 하려고 하는데 차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비켜갈까 하다가 조금 기다렸더니 그 차도 우회전을 하기에 따라서 우회전을 했더니 조금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안 되겠다 싶어 왼쪽으로 비켜가려고 차를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앞차가 후진을 하더니 내 차를 북 긁어버렸다. 짜증이 났지만 차 안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내렸다. 서로 시비를 가리는 게 싫어서 “각자 보험회사에 연락하죠”라고 한 마디 던지고는 바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앞차 운전자는 몇 마디 하다가 근처 다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내 차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몇 가지 확인을 하는 중에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판사로서의 직업병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사건의 내용이 뒤바뀌거나 나중에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온 탓에 보험회사 직원에게만 맡기고 그냥 지나치려니 무언가 찝찝함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당혹스러운 일을 예방하기 위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사고접수를 했다.

잠시 후 나와 앞차 운전자는 파출소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먼저 음주측정을 했다. 나야 당연히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앞차 운전자는 혈중알코올농도가 0.097이 나왔다. '그래서 그랬구나' 앞차 운전자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 조사를 받던 앞차 운전자가 경찰관에게 내 이름을 묻는다. “장동혁씨입니다” 순간 앞차 운전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동혁아, 30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이렇게 만나는구나. 미안하다.”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앞차 운전자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아… 중학교 친구.

몇 초 사이에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친구가 아니더라도 미안한 상황이 되었는데, 내가 친구를 전과자로 만들 판이다. 하지만 이미 음주측정까지 마치고 조서까지 다 작성한 뒤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책임을 지고 있는 판사지만 명절날 집에 내려와서 중학교 친구를 전과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조사를 마치고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무슨 일이냐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중학교 친구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무거운 마음은 명절 내내 이어졌다.

며칠 전 다른 중학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음주운전 했던 그 친구가 운전면허가 취소되고 직장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벌금도 적지 않게 나왔다고 했다. 회사에서 운전하는 일을 했는데 면허가 취소되다보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얼음이 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친구의 얼굴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아이들도 있을 텐데…. 운전면허 취소, 벌금, 전과자, 실직. 나 때문에 그 친구에게 너무도 가혹한 상황이 오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판결했던 피고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도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였을 것이다. 내가 내린 판결로 인해서 보이는 형벌 말고도 보이지 않는 형벌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피고인들도 있을 것이다. 음주운전 사건은 판사가 접하는 사건 중 아주 경미한 사건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피고인에게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사건이고, 판결문에 쓰인 형벌 외에도 보이지 않는 형벌이 가해진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친구야, 미안해. 그래도 이 번 일이 더 큰 일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5.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1.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2.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3.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4.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5.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