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주환 한국사회복지관협회장 |
그런데 다양한 채널을 통해 민관협력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당연히 그리해야 할 일인데도 굳이 강조점을 찍는 것은 그럴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민관협력의 역사는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줄기차게 강조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복지분야에서 민관협력의 실상이 특히 그렇다. 박정희 정권이 말하는 민관협력은 '관의 지시, 민의 이행'이라는 주종적(主從的)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모든 것이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시기이기 때문에 복지문제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복지나 민관협력은 개념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때라고 보는 것이 정직한 평가다.
전두환 정부시절의 민관협력은 공포정치에 기초했기 때문에 민관협력이라는 정책적 공간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군관민(軍官民)'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관협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집권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당시의 집권세력은 집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복지국가 창달'이라는 국정과제를 설정했지만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전력을 다했을 뿐이다. 이때의 민관협력은 오로지 전시(展示)나 동원(動員)의 객체로서의 색채가 강했다.
정권이 문민화 된 이후의 민관협력은 오랜만에 제자리를 찾는 듯이 보였다. 회의도 열리고, 민간인의 정부참여도 늘어났다. 민간의 제안으로 법률이 제정되고, 민간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빈도가 증가했다. 문제는, 폭압적인 정권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복지욕구로 분출되면서 국가정책의 화두가 '복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정치권은 복지에 대한 민관협력에도 열을 올리게 되었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복지의 강화 혹은 복지의 확대가 주요공약으로 내걸리게 되었다. 민관협력도 정치색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국민들은 이런 변화에 환호했다. 하지만 세계경제와 국가의 재정 그리고 복지과잉론을 앞세운 신자유주위자들이 발목을 잡았다. 사실은 인간에 대한 투자에서 토건을 중심으로 하는 투자로 변한 국가정책이 더 큰 문제였지만 모든 것을 다 묻어버릴 기세로 토건사업이 용맹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민관협력은 다시 뒷전으로 밀렸다. 자신들만의 의견교환을 민관협력이라고 강변했고, 자신들의 의견에 반하는 세력과는 대화조차 거부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열리는 회의와 국가재정의 부족분을 민간에게 떠넘기는 것을 민관협력이라고 우겼다. 아쉽게도 우리의 민관협력은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 강화되었다가 정부의 판단에 따라서 약화되는 '두더지 게임'이 반복되고 있다. 사실 민관의 협력은 민주적인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관이 만능일 수 없고, 민이 만능일 수도 없다. 규범적 권한을 가진 공공영역과 전문성을 가진 민간영역이 기술적으로 결합하여 생산적인 논의의 틀을 유지한다면 건강한 사회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사회경제적 갈등의 완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
'희망찬 세상'이건 '행복한 세상'이건 정부가 다 만들 수는 없다. 민간영역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잘 포장된 헛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민관협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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