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기업들은 경기침체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고,
직원들은 구조조정과 법정관리, 부도 등으로 일터에서 언제 내몰릴지 모르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구조조정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인생의 제2막을 열어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적응해나간다면 남보다도 다른 인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제2막을 성공적으로 써 나간 사람 가운데 최주만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대전시지부장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 그는 평생직업으로 알았던 은행원 생활을 마감하고 떠나야 할 시기에 남들보다 먼저 직장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찾았다. 공인중개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것이다.
그는 공인중개사로 제2의 인생을 길을 연지 10년째를 맞은 올해 지역 공인중개사들의 수장이 됐다. 그리고 일성으로 “회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일꾼이 되어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주만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대전시지부장을 만나 은행지점장에서 공인중개사로 변신하게 된 동기와 향후 부동산 시장의 전망 등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 최주만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대전시지부장 /사진=손인중 기자 dlswnd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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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생활
“1954년 내장산 인근인 전북 정읍시 상리에서 태어났죠. 아버지께서 경찰 공무원이다보니 지역 전출이 잦아 주로 전북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정읍 서국민학교(초등학교)와 정읍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이 박봉이라서 유년시절 여유롭게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직장을 잡을 생각에 중학교 시절 전주상업고 진학을 선택했다.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이 가물가물한데요. 아마도 별명이 새색시였던 것으로 기억돼요.”
최 지부장은 학창시절 얌전하고, 키가 작아서 앞에서 10번 안에 들었다. 교실에서도 앞 자리에 앉아서 착하고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당시 말수가 적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한 덕(?)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새색시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별명이 됐다.
“공부는 꽤 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주상고 다닐 때 8개 학급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상위권에 들었죠.”
그는 고교시절 은행시험 준비를 위해 하숙생활을 했고, 모범생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주택은행에 합격하다
“상고 졸업 후 은행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은행을 선택해 시험을 봤는데, 그때 선택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서울은행, 산업은행 등 여러 은행이 있었으나 은행마다 시험과목이 서로 달랐다. 영어중심의 과목이나 작문중심의 과목 등으로 달랐는데, 그런 시험전형을 잘 알지 못해 서울은행 시험을 봤다가 실패했다.
최 지부장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곧바로 전투경찰(17기)에 지원했다. “대전에도 동기생들이 꽤 살고 있더군요. 지금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군생활을 하면서도 은행 취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가장 자신 있었던 과목은 영어로, 시험에서 1~2개 정도 틀리면 화가 났을 정도였다. 그래서 군생활 중 주택은행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1977년 11월에 제대한 그는 이듬해인 1978년 1월 1일부터 주택은행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본점과 여의도에서 근무하다가 전주로 지원해 행원 생활을 대부분 고향에서 했다. 이후 승진과 함께 1978년 주택은행 대동지점으로 발령받으면서 대전과 인연을 맺었다.
“대전생활도 어언 30년이 훌쩍 넘은 것 같아요. 이젠 제2고향이 됐죠”라며 활짝 웃어보인 그는 대전에서 사는동안 활발한 활동을 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 은행원 생활 청산하고 공인중개사로 새 출발
“당시 주택은행의 경우, 서민 주택 금융을 취급했죠. 그렇다 보니 인생의 제2막을 부동산과 관련된 공인중개사의 길로 새 출발하는데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주택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업무가 청약이나 경매와 관련된 일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은행 퇴직 후에도 부동산 분야에 대한 적응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은행업무는 고객 서비스가 최우선인데, 최 지부장에겐 은행 근무경력이 밑거름이 됐다.
2002년 12월 말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400~500명 가량의 지점장이 구조조정으로 졸지에 직장을 떠나야 했다. 당시 합병반대 시위도 많이 했고, 대학살이라는 말로 구조조정이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점장이었던 최 지부장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가장 먼저 은행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리고 자격증 시험준비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게 바로 공인중개사 시험이었다.
“공인중개사시험을 한번에 합격했죠. 전반적으로 그렇게 어려웠던 과목은 없었던 것 같아요. 주택은행에서 취급했던 업무들과 공통점이 많아 시험에 비교적 쉽게 합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인생은 제로베이스, 퇴직 후를 미리 준비
최주만 지부장은 그런 과정 속에서 인생은 '제로베이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구조조정 시 버텼던 지점장들은 2~3년 뒤에 대부분 퇴사를 했죠. 하지만, 그들은 퇴직 후를 준비하지 않아 지금은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는 그런 것을 보면서 인생도 미리 인프라를 우선해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50대가 되면 초반과 중반의 경쟁력 차이가 현저한 것 같다는 그는 “은행에서 더 버텼다가 나왔더라면 지금과 같이 공인중개사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 제2막 공인중개사로 활동
“2003년 4월 노은동에서 개업했죠. 당시만 하더라도 자고 나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시기라서 타이밍상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처음만해도 노은 11단지 계룡 리슈빌 아파트의 경우 프리미엄이 없었다. 하지만 준공을 1년 앞둔 시점쯤에는 하루에 몇백 만원씩이 올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보통 1억5000만원에 분양을 받았던 아파트가 입주 시에는 3억원 가까이 뛰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6년에서 2007년까지가 부동산 시장을 놓고 볼 때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고 생각돼요. 당시만해도 부동산 열기가 뜨거웠죠.” 최 지부장은 이 때 시장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러나 이후 2008년 금융위기가 불어닥치면서 부동산 시장은 한동안 냉각기를 맞았다.
그러다 2011년에 도시철도 2호선 발표와 신세계 첼시아울렛, 과학벨트 등 지역에 호재가 생기면서 10% 정도 지역 부동산 시장이 상승했다. 그리고는 이후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최 지부장은 이후 대전의 중심인 둔산동으로 사무실을 옮겨 부동산 중개업무를 이어왔다.
▲국회 계류중인 부동산 관련 법안 조기 처리 필요
“최근 취득세 영구 인하의 경우, 여야가 합의를 해서 된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머지 다른 대책은 아직도 국회에서 계류중인데, 하루빨리 통과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역 부동산 시장도 살아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ㆍ월세 상한제만은 반대입장입니다.”
전ㆍ월세 상한제 반대 이유로 그는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무조건 시장을 규제하며 전ㆍ월세 상한제를 시행하게 되면 이면계약 등 불법적인 계약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처럼 부동산 시장의 침체기가 이어지는 것은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을 들었다.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가격 상승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전의 경우, 공급이 많다고 볼 수 있으며 세종시가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규모를 흡수했다고 지적한 최주만 지부장은 “그래서 대전에서 많은 사람이 이주했고, 대전지역에서의 상승할 여력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라고 우려했다.
여기에 “도안의 경우 불완전한 신도시인데다 대전에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인구유입, 산업단지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기존 도시를 견인할 장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저금리 시대 속에서 여유자금이 있다면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게 아직은 나은 것 같다”면서 “수익형의 경우 상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상가는 오래되더라도 감가상각이 많지 않아 투자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토지는 천안이나 충남 서북부가 유망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며 소형아파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군림하는 시지부장 NO
“최근 공인중개사법이 발의됐다. 예전에는 공인중개사업무 및 실거래가 실무법이었는데 이제 공인중개사법이 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최 지부장은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등에서 중개사에 대한 법이 애매모호한 것이 많은 만큼 별도로 공인중개사법이 통과되면 공인중개사들도 긍지를 갖고 업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협회는 회원들의 방패막이가 아니고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하는 회원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는 그는 “당선과 함께 회원들을 위한 방패막이와 심부름꾼이 되고자 우선적으로 협회에 즉시상담콜센터를 개설ㆍ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군림하는 지부장이 아닌, 회원들을 위해 봉사하는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겠다는 게 최 지부장의 포부다.
대전시지부 회원 중개사가 5개 지회ㆍ2457명에 달한다는 최주만 한국공인중개사 대전시지부장은 “공제에 가입하면 중개사고가 발생하게 되더라도 1인당 최고 1억원까지 보상을 해주고 있다”면서 “공인중개사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고 중개환경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조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위에 소박하기로 소문난 최주만 지부장의 주량은 소주 1병 정도며 색상은 화려한 보라색를 좋아한다. 필요하다면 은행원 시절 갈고 닦았던 골프실력을 발휘해 대외활동에도 적극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대담=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ㆍ정리=이경태 기자
● 최주만 지부장은…
▲1954년 11월 20일 전북 정읍시 상리 출생
▲1994년 2월 한밭대 경제학과 졸업
▲1978년 국민(주택)은행 입행
▲2001년 국민은행 가장동 지점장
▲2003년 4월 노은동 다다공인 개설등록
▲2005년 11월 대한공인중개사협회 대전시지부 부지부장 선임
▲2009년 9월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대전시지부 부지부장 임명
▲2007년 12월 둔산동 가람공인 이전 등록
▲2008년 4월 대전시 서부교육청 공유재산 심의위원 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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