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으로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되고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자 묘 두개를 파서 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후 활 끈으로 목을 매어 죽음을 택하며 아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더구나 저 남한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인조실록 권34, 15년 1월 임술조)라 하여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의리를 밝혔다.
나라에서 '충목(忠穆)'이라는 시호와 함께 충신정려를 내리고 후에 송시영과 함께 숭현서원의 본사에 올려 이들의 충절을 숭모해 향사하였다. 조선 중기 관직을 두루 거친 문관이며 충신이자 병자호란때 강화도가 함락의 위기를 맞자 자결한 죽창 이시직(1572~1637)의 충절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이 대덕구 송촌동 대양초등학교 뒤 대양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조그만 한 칸의 집이며 종중들에게만 소중하게 여겨질 건물이었다. 다들 그 옆에 있는 놀이터에 들렀다가 우연히 또는 뭔가 싶어 한번 둘러볼 만한 그 곳에는 목숨으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분이 모셔져 있는 소중한 공간이 있다. 나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당신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당신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요?'라고….
이순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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