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의 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때 하이먼 제독은 카터에게 해군사관학교의 성적을 물었다.
카터는 “820명 중에 59등을 했다”고 나름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돌아온 하이먼 제독의 말은 “자네, 최선을 다했는가?”였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미다. 제독의 말은 카터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에게 내 놓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이 '적당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욕먹지 않을 정도로' 일하며 살아간다. 한국은 경제적인 빈곤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사회도 어느 정도 안정됐다.
하지만, 지금이 문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이 단순히 '안정'과 '현상 유지'인가. 복지부동 자세라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내가 책임을 맡은 기간에 문제만 없으면 된다'는 생각은 긍정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정신으로는 어떤 발전과 개혁도 기대할 수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을 불태운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씨스티나(Sistina) 성당 벽화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거대함 때문이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4년간 건강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집중하며 완성한 '최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당의 바닥에서 천장을 어찌 꼼꼼히 볼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이유를 도덕률(moral law)에서 찾았다.
칸트는 “반짝이는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마음에는 도덕률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자연계에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별이 있는 것처럼, 인간 의식에는 반짝이는 별과 같은 도덕률이 존재하는데, 칸트는 인간의 행복을 이 도덕률을 따르는 삶에서 찾았다. 칸트는 최선을 다하고 도덕률을 지키면서 사는 삶에서 꼭 전제돼야 할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칸트의 저서'실천이성비판'에 따르면,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이며 다른 것은 영혼의 불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선을 행하지 않고, 도덕률을 폐기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은, 우선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영혼은 영원해 자신이 생명이 있을 동안에 행했던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이유에서다.
우리는 삶을 두 가지 중대한 사실 앞에서 돌아보며, 최선의 삶을 다짐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앞이고, 둘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다.
역사와 절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평가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 또 주어진 의무를 어떻게 감당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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