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포 김만중선생 정려각 내부 모습. 김만중 선생 조각상과 정려현판이 눈에 띈다. |
대전으로 이사와 동춘당(同春堂 )표지를 보았을 때 대전의 큰 한약방이 있나? 라고 생각했고, 쌍청당(雙靑堂) 소리를 들었을 때는 큰 요릿집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대전의 역사문화를 알기 위해 배우러 다니다 보니, 모두가 기호유학의 중심지이자 대전의 훌륭한 문화유산이었다.
전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북대전나들목(IC)쪽으로 250여m쯤 가다보면 한국한의학연구소 맞은편에 선비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처음 이 표지석을 보고 서울 한옥마을 모양으로 큰 선비마을이 나오려니 하고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보니 능선에 묘지 몇 개만 보여 '역시 서울만 하랴' 하고 피식 웃으며 내려 온 적이 있다.
묘에서 내려오며 오른쪽에 있는 서포 김만중 문학비만 보았어도, 또 왼쪽 몇 걸음 더 가서 훌륭한 정려각만 보았어도 좀 더 관심을 가졌으련만, 이 역시 알아야 보인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는 한 사례였다.
여기 선비마을 중심지 언덕에는 광산 김씨 선조들의 묘가 몇 기 있으며 아래로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서포의 부(父) 김익겸의 충신 정려와 역시 강화도에서 자결한 서포의 조모 연산서씨의 열녀정려각과 서포의 효자 정려각이 있어 지금도 충효열의 고장으로 부르고 있는 곳이다.
서포(西浦) 김만중(萬重·1637.2.10~1692.4.30)선생은 아명이 선생(船生)이었다.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나고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올 때 배 선상서 태었났다하여 지여진 이름이라 한다.
서포의 가문은 증조부가 이이 율곡의 제자이며 기호학파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이며 부는 병자호란시 강화도에서 영의정 김상룡과 함께 순절한 충정공(忠正公) 김익겸이다. 숙종의 첫째 비인 인경왕후는 그의 형 김만기의 딸이다.
서포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으로 남편 김익겸이 순절한 이후 유복자 김만중과 형 김만기를 가르치며 키워 형제가 다 대제학에 제수 되었다. 서포는 숙종의 인현왕후 사건과 관련되어 1689년 남해로 유배되었고 이러한 와중에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애통해하며 가슴을 치다가, 1692년 남해 노도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남해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있다.
'오늘 아침 사친의 시(思親) 쓰려 하는데/글씨도 이루기 전에 눈물먼저 가리 우네/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 도로 던져버렸나/응당 문집 가운데 해남의 시 빠지겠네. -1689년 9월 25일 어머니 생신날
그의 사후 숙종실록 전 판서 김만중의 졸기에서는 “적소에 있으면서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만나 분상(奔喪)할 수 없으므로 애통해 하며 울부짖다가 병이 되어 졸(卒)하게 되었으므로 한때 슬퍼하며 상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라고 기록,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고, 문효공(文孝公, 글이 뛰어나고 효자라는 뜻)이라는 시효가 내려졌다.
필자는 생각해본다. 예나 지금이나 효의 방법은 달라도 효의 정신은 같지 아니한가? 예로부터 우리 대전은 선비의 고장, 충효열의 고장이라 불리고 있다. 송촌동의 상, 하 송천리 삼강려(충·효·열), 도룡동에 여흥 민씨 삼세칠효(三世七孝), 이곳 전민동의 삼강려, 모두 가다듬어 빛낼만하다.
김영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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