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배 송촌장로교회 목사 |
“하루살이야, 벌써 저녁이 되었으니 내일 만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이 분명히 있는데 말입니다. 하루살이가 죽고 나니 메뚜기가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친구가 다람쥐이었습니다. 다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 왔습니다. 하루는 다람쥐가 “메뚜기에게 말합니다. 내년 새 봄에 만나서 놀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말합니다. “내년이 뭐냐고?”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내년이 분명히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아는 것만큼 살다가 죽기도 하고 아는 것만큼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무리 모두도 죽게 되겠지요. 죽음에 주인공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에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죽음의 길을 가겠지요. 세계적으로 하루에 약 30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죽음을 이긴 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한 자도 없습니다.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권세자도 부자도 죽음 앞에 모두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최첨단 물질문명 과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명을 조금은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죽음이지요. 죽음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발전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수천 년 전의 죽음이나 최첨단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오늘이나 죽음의 모습은 똑 같습니다. 그리고 공평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삶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죽음은 오직 한길, 죽음의 모습은 똑 같습니다. 이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밤이라도 오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허무한 인생,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삶이 진실하고 바르게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젊다고, 오늘 건강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사후의 세계를 인정했음을 보게 됩니다. 중국의 진시황능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본능입니다. 다른 그 어떤 생명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본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 육체를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넣으니 생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며 흙에서 살다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에 통치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천국백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고 합니다. 첫째로 천국에서의 시작이고 이 땅에서의 끝입니다. 출산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나듯이 죽음을 통해서 내세에 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천국에서의 만남이고 이 땅에서의 잠시간 이별입니다. 먼저 가신 분들을 만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했던 할머니를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합니다. 이 땅에서는 이별이기에 눈물을 흘리지만 천국에서 만남이기에 큰 기쁨일 것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천국은 이별이나 아픔, 고통,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짐, 모든 질병을 내려놓고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삶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임종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라고 상을 소망했습니다. 다섯째는 죽음을 '잔다', 잠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육신이 무덤에 묻힌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잠자는 사람은 일어나듯이 무덤 속에 잠자던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천국에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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