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
대전역의 초기 이름이다. 이층에는 서양식 식당이 있고 건물의 지붕 장식물은 당시 러시아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목척교에 목척(木尺·나무로 높이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이 있었나? <사진 2>
오래된 질문이며 지금도 가끔 필자에게 묻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목척교의 유래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지만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목척교의 이름은 '대전교'로 표기되어 있다. 이 숙제를 풀어보려고 대전교 엽서사진 세 장을 고해상도 이미지스캔을 하여 확대하여 보았으나 한 장에서만 줄이 그려지고 숫자가 선명한 것이 보인다.
▲ 사진2 |
▲ 사진3 |
1908년 한호농공은행으로 출발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자금을 주로 취급하였으나 이후 조선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병합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고 이후 조흥은행이 다시 그 터에 새로 은행건물을 지었으며 현재는 신한은행 대전역금융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사진3-1 |
▲ 사진3-2 |
▲ 사진4 |
최근 근대문화재 활용 논란의 중심에 놓여있는 도청관사촌의 건설당시 사진과 설계도는 알 수 없으나 완공된 후의 사진은 194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엽서사진에 남아있다. 흑백사진에 푸른색을 덧칠한 것이며 현재의 도청관사촌(네모 칸)의 일부와 현재 대전고등학교(1920년대 대전중학교) 본관과 특별교실, 기숙사 모습이 선명하다. 아쉽게도 본관마저 몇 해 전에 헐리고 당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는다. 위쪽의 넓은 운동장이 있는 건물이 현재의 대전여중(1920년대 고등여학교)이며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의 복원, 보존, 활용에는 기본적으로 시기별로 변모하는 과정의 정확한 지도가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문화재의 가치는 제자리에 있어야 하며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활용 또한 현재 우리들의 몫이다. 문화재의 성격에 맞는 활용방안을 찾아내는 고민에 150만 현재 대전시민의 기준이 아니라 미래의 시민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원도심 살리기의 기준이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 의견이다.
임헌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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