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칠월칠석을 맞아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 칠성당이에서 마을 당제가 열렸다. 제수와 함께 놓인 물 일곱 그릇이 눈길을 끈다. |
13일 칠월칠석을 맞아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 칠성당이에서 마을 당제가 열렸다. 제수를 마련하고 정한 물 일곱 그릇 떠 놓으면 제사준비 끝이다. 예전에는 마을 아낙들이 떡을 빚고 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마을 회비로 성별 구분 없이 마을 어르신 모두가 참여하여 제를 준비한다.
당제를 취재 가면서 '내 차가 방해가 될까' 한 쪽으로 비껴난다는 게 너무 많이 비껴 차량바퀴가 논에 빠졌다. 그 덕에 음복도 못했다. 마을 어르신이 “술 안 먹고도 차가 빠졌는데 술 먹고는 아예 못 돌아가서 안 된다”며 농을 하신다. 참 유쾌한 민족이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북두칠성의 소관이니 우리는 그냥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애면글면 할 필요가 없다. 칠성신앙은 한 치 앞을 모르고 사는 기댈 곳 없는 백성들에게 참으로 마땅한 삶의 철학이 되어 주었다.
안영일(73)씨는 자식 열을 낳고 넷을 잃은 어머니가 마지막 남은 아들의 무병장수를 위해 칠성당이에서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빼놓지 않고 정성을 드렸다 한다. 이렇게 칠성당이는 갖가지 소망을 품은 마을 아낙들이 치성을 드리던 장소였다. 아낙들만 칠성당이에 올랐을까? 남자들에게 물었더니 “공식적으론 간 적이 없어요”하며 모두 손사래를 치신다. 하지만 삶의 험한 파도가 남자라고 비껴가지 않으니 비공식적으론 아무도 모를 양이다.
제에 참례한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들은 칠십이 넘었다. 이 분들이 어렸을 때도 당제가 여기에서 열렸고 그 후 80년대쯤 중단되었다 이런 저런 사고를 빌미로 다시 제를 지내게 되었다. 칠성당이에는 크고 작은 일곱 개의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다. 굄돌을 놓고 큰 돌을 올려놓는 바둑판식 고인돌(지석묘)이다. 칠성당이 고인돌과 이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기의 고인돌은 청동기 때의 매장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덮개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으니 마을 어르신들이 어렸을 적엔 사람이 만든 고인돌인 줄은 모르고 일곱 개의 영험이 신통한 바위인줄 알았다.
현재 사유지 안에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이 불편하다. 김태완(69)씨는 도로명이 칠성당이길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가 죽고 나면 여기가 칠성당인줄도 모를 것이다” 그는 칠성당이로 가는 길이 새로 생기고 후손들이 마을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희망한다.
날씨가 무더워 당제는 일찍 시작됐다. 10시 반도 되기 전 제를 끝내고 모두 회관에 앉았는데, “점심 일러유?” 하고 묻는다. “이르지.” “한 번 먹음 두 번 달라 안 할 테니 빨리 먹고 치우는 게 좋다”는 아주머니 일갈에 두 말없이 “그러지” 한다. 이르디 이른 점심이지만 백숙을 한 그릇씩 모두 맛나게 먹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아낙들의 위세는 어느 마을에서나 높다.
칠석날이 되면 여기저기서 마을제와 축제가 열린다. 문화는 21세기의 또 다른 발전 동력이다. 예전에는 동네일이 있을 때 사오십 대가 주축이 되었는데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이젠 칠십 대가 주축이 된다. 세대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야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와글거리고 그 아이들을 야단치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울러 퍼지는 왁자지껄한 마을 축제를 꿈꾼다. (객을 반갑게 맞아 준 교촌3통 주민들과 무더운 날 당제 준비하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랴 땀 흘리며 애쓴 김명수 통장께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김혜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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