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항리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시골 소녀. 초등학교 2학년 때 정미소를 하던 부모님이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꿈에 그리던 서울생활을 하게 된다.
사투리가 심했던 이 소녀가 선생님 말씀에 '예'라는 대답만 해도 친구들은 깔깔대며 놀리곤 했다. 화장실에 같이 갈 친구마저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에서 그 시절 마음 둘 곳이라곤 만화였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의 취직자리였던 은행이나, 투자신탁회사를 마다하고 친지의 말을 듣고 생명보험협회에 입사했다. 그는 협회와 함께 한 길을 걸은지 벌써 35년이 됐다. 그리고 생명보험협회 최초의 여성부장에 이어 최초의 여성 본부장이 됐다. 박경미(53) 생명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의 얘기다.
▲ 사진=손인중 기자 dlswnd98@
|
“개인적으로 이야깃거리가 없지만, 생명보험의 기능과 중부지역본부를 알릴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는 박 본부장의 말에서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경남 함안에서 서울로 이사왔다면 시골에 대한 추억도 남다르실텐데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정미소를 이어 받아 운영하신 것으로 생각돼요. 학교 종이 울려 뛰어나가면 늦지 않을 정도로 집 대문과 학교 교문이 마주하고 있었죠. 하지만 어렸고,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때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하게 되면서 고향의 친구나 추억이 크게 없는게 늘 아쉽습니다.”
서울로 이사 온 후 설?던 마음도 잠시, 어린소녀는 반 친구들이 사투리를 흉내내면 얼굴이 빨개지는 어리숙하고 수줍었던 시골 아이였다.
“당시 혼사서도 잘놀던 내게 유일한 친구는 만화였어요. 밥 때도 잊고 만화방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나중에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만화도 보고 글도 읽으라며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용 월간 잡지를 구독시켜 주셨던 것 같아요. 평양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오늘 당장 죽어도 괜찮을 만큼 열심히 살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여린 마음은 아버지를, 노력하는 면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6남매중 셋째. 바로 위 언니가 인문계고를 진학했지만, 모든 형제가 대학을 진학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경남 함안의 시골소녀는 중학교 졸업후 바로 취직이 보장되는 여상에 진학했고,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은행이나 투자 신탁회사 대신 생명 보험협회에 입사하게 된 것은 친척의 조언이었다.
“사실 입사할 당시만 해도 크게 매력을 못 느끼던 곳이었는데 1년도 안돼 생명보험설계사로 전업할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달이 나오는 책을 보고, 모집인(당시 보험설계사)들의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울게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그리고 그는 기획조사부에 입사해, 경영관리팀장, 홍보개발팀장을 거쳤다. 중부지역본부 발령 직전 보직은 사회공헌실장이었다.
사회공헌업무를 맡으면서 도울 곳이 정말로 끝없다는걸 배웠다. 특별히 어느 부분, 어떤 대상을 먼저 시급히 도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수많은 소외된 곳, 가난한 사람, 미흡한 분야가 많았다.
-최초의 여성과장, 여성부장, 여성본부장과 같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오래 다녔기 때문이겠죠?(웃음). 지금은 여성 지도자의 시대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잖아요. 여성으로서 일하면서 업무 파트너는 항상 남성이었고, 여성 관리자를 생소해 하는 사람도 무척 많았어요. 하지만 연합해서 일하고,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업무 경험을 통해 '군자는 융화하나 같지는 않고, 소인은 같으나 융화하지 못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또 여성의 경우 겸손함이 미덕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조직안에서 지나친 겸손은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박 본부장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골드미스'다. 그러면서도 효녀다.
-주위에서 왜 이제까지 결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을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철모르던 20대 때에는 독신녀로 살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웃음) 어쩌다 30대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나니까 결혼하기가 더 어렵더라구요. 가장 힘든 점은 결혼한 친구들과 만나면 아이들이나 살림살이 등 공동된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점 이었죠.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조금은 멀어진 것 같아요.”
결혼하지 않은 여성 관리자로 부하나, 조직을 이끄는 그녀만의 비법은 바로 제로로 놓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가 어느정도 위치에 올라와 보니 선배들이 나를 얼마나 참아줬는지를 알겠더라구요. 후배나 동료 직원을 대할때 제 안의 기준으로 상대를 섣부르게 재단을 하지 않고 제로의 상태에서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일산에 살고 계신 부모님을 찾는다. 그리고 토ㆍ일요일은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
“30대때까지만해도 결혼 안한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죠. 이젠 이해하셔요. 제 마음은 부모님과 항상 같이 할 수 있어 오히려 편한 것 같아요.”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 생명보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을 보면 교육, 결혼, 주택마련, 질병치료, 노후준비와 같은 수많은 비용이 들어가거든요. 생명보험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대비이자 안전에 대한 준비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보험은 단기간에 목돈을 마련하는 저축과는 다르게 길게는 수십년간 보험료를 내야 하는 특성이 있어요. 본인의 경제상황, 가입여력, 필요에 맞춰 약속된 기간동안 보험료를 낼 수 있는 상품이어야지 아는 설계사에게 '한 건 들어주거나' '10만원, 20만원 보험료로 고를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생명보험 플랜을 짜야 한다면 가장 고려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개인이 처한 상황, 경제수준, 보험료를 계약된 기간 동안 낼 수 있는지를 판단해서 적합한 상품을 고르는 게 맞겠죠.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비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망보험, 바깥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재해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보험, 암이나 특정질병에 대한 가족력이 있다면 그에 따른 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박 본부장은 25년째 수영을 해올만큼 취미가 수영이다. 수영의 지구력과 위급할 때 자신을 지킬수 있는 호신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삶과 일과 닮았다.
-중부지역본부가 올 1월 1일자로 대전지부에서 격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부지역본부가 비록 올해 출범했지만, 60여년 생명보험협회 역사를 통한 인적자원과 업무경험을 갖고 있어요. 지난해까지는 생명보험을 판매할 수 있는 자격시험을 치르는 일과 국민들의 보험가입여부 조회업무와 같은 비교적 사무실에서 대부분 해결되는 조용한 업무였다(매년 중부지역본부에서는 약 1만명이 설계사 자격시험을 본다)면 올해부터는 시작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금융보험교육이 추가로 늘었어요. 머지않아서는,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를 위한 금융교실에 이어서 어르신을 위한 금융교실을 계획하고 싶습니다.
지난 6월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 시장만족도에서 생명보험이 자동차와 대형가전에 이어 3위를 차지했어요.
눈으로 보고 기능을 테스트할 수 있는 자동차나 대형가전에 비해 사람이 종이만으로 판매하는 무형상품인 생명보험이 만족도 3위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고객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주량이 소주 한병 정도라는 박 본부장. 그는 어릴적 많이 울어 울보란 별명까지 얻었다. 이 덕(?)에 그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으로 알려졌다.
'누구없소'(한영애)와 '그리움만 쌓이네'(여진)는 박 본부장이 즐겨 부르는 '18번'으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앙코르'를 요청받는다.
수영 또한 수준급인 그의 소망은 청소년의 마음교육과 보릿고개, 한국전쟁을 등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돕는 일이다.
●박경미 본부장 프로필
1960년 8월 17일 생으로 경남 함안군 가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산업심리학과를 졸업했으며 1978년 생명보험협회에 입사해 경영관리팀장, 국제조사팀장, 홍보개발팀장을 거쳐 중부지역본부장으로 재직중이다.
대담=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ㆍ정리=오희룡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