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사기성 기업어음(CP)에 투자해 돈을 날린 피해자가 상품의 위험성을 인식할 만큼의 금융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투자를 권유한 증권사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LIG건설에 이어 최근 웅진그룹까지 1천억원대의 사기성 CP를 발행한 사실이 적발돼 줄소송이 예상되는 가운데 나온 판결이어서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이원형 부장판사)는 변호사 A씨가 "LIG건설 CP에 투자했다가 날린 1억9천258만원을 지급하라"며 우리투자증권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A씨는 2010년 10월 우리투자증권 직원의 권유로 신탁계약을 체결하고 만기 6개월의 LIG건설 CP에 2억원 가까이 투자했다.
그러나 만기를 한 달 앞둔 이듬해 3월 LIG건설이 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투자금을 날리게 됐다.
A씨는 "우리투자증권이 CP 매수를 권유하면서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LIG그룹의 지원 가능성 등을 거짓으로 알려줬다"며 소송을 냈다.
실제로 증권사 직원은 A씨에게 CP의 신용등급과 신용평가서를 이메일로 보냈을 뿐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의 경력과 투자성향으로 미뤄 증권사 직원의 설명이 불충분했거나 왜곡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20여 년의 검사 재직기간을 포함해 30여 년의 법조경력을 가진 변호사로서 기업어음을 비롯한 금융투자상품의 일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췄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A씨가 신용등급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신용평가서 역시 법조경력 30여 년의 A씨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라며 "CP의 내용과 위험성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A씨가 우리투자증권을 통해 투자한 주식·채권·기업어음이 34억원어치에 달할 정도로 투자경험이 풍부한 점, 계약 당시 자신의 투자성향을 '공격투자형'이라고 적은 투자정보 확인서에 서명한 점도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LIG건설은 회생절차 신청 직전 2천150억원어치의 CP를 발행했고 피해자들의 소송이 잇따랐다. 법원의 판단은 피해자의 투자경험이나 금융지식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서울고법은 지난 2월 김모씨 등 2명이 낸 소송에서 증권사의 책임을 30%로 인정하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증권사가 고령인 피해자에게 신용평가서를 제공한 사실만으로는 설명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투자 위험을 명확히 설명해 고객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LIG건설 CP를 샀다가 1억원을 날린 서모씨는 지난 4월 같은 법원에서 패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서씨가 스스로 금융상품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이 있어 오로지 직원의 권유에 따라 투자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증권사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구자원(78) LIG그룹 회장과 구본상(43) LIG넥스원 부회장, 구본엽(41) 전 LIG건설 부사장 등 오너 일가는 지난해 11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윤석금(68) 웅진그룹 회장도 지난해 1천198억원 상당의 사기성 CP를 발행한 혐의로 지난 7일 불구속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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