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품질유지기한'이 표시된 국내맥주와 '유통기한'이 표시된 수입맥주. |
석교동에 사는 김모씨(29·남)는 동네 슈퍼에서 H맥주 피처 3병을 구입했다. 맛이 좀 이상한 것 같아 표시사항을 보니 제조일이 2012년 12월, 유통기한은 제조일로부터 6개월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1개월 이상 유통기한이 경과된 제품을 판매한 것이라고 생각해 즉시 슈퍼로 갖고 가 항의했더니 '미처 몰랐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신고는 하지 말아달라며 70만원을 배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뒤 슈퍼주인이 집까지 찾아와서 “맥주는 유통기한이 없으며, 자신은 유통기한 경과제품을 판 것이 아니니 신고대상도 아니고, 따라서 배상금으로 받은 70만원을 돌려달라”고 했다. 일단 한 번 받은 건데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하느냐는 것이 상담의 주제였다. 결론은, 소비자는 합의금으로 받은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
소비자가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슈퍼 주인은 맥주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줄 알았을 것이고 이 소비자가 젊잖게 '유통기한이 지났군요'라고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고를 하겠다”, “제발 한 번만 봐 달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을 것이고, 신고시 과태료나 영업정지 등의 행정처분을 우려하여 무마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동네 슈퍼에서 유통기한 경과식품을 판매하거나 진열했다가 적발되더라도 과태료는 30만원이다. 그 슈퍼 주인은 이런 사실을 몰랐으니 과도하게 70만원이나 되는 합의금(?)을 지불했던 것이다. 맥주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품질유지기한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기간이 지나서 판매를 했더라도 식품위생법상 저촉되지 않는다. 그런데 소비자는 '품질유지기한'을 무심히 '유통기한'으로 인식했고, 슈퍼 주인도 식품판매업자로서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오래 두어도 품질에 별 문제가 없는 설탕, 빙과류, 식용얼음, 껌류, 정제 소금, 소주와 위스키 등 알코올 성분이 높은 주류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는 유통기한이 표시되지만 맥주에는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기한'이 표시되고 있다.
2000년도부터 '제조일자'만 표시되었다가 2007년 12월부터 '유통기한표시'로 강화되었으나 국내 맥주제조사에서 표기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다가 2009년 5월부터 제조일(또는 용기주입일)과 함께 6개월(PET포장제품) 또는 12개월(병 또는 캔 제품)의 품질유지기한을 제조사 자율로 설정해 표시하도록 했다.
쉽게 말해 유통기한이 아니기 때문에 품질유지기한을 경과한 제품을 판매해도 식품위생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실제로 국내 제조 맥주는 모두 '품질유지기한' 표시가, 수입 맥주도 일부 '유통기한'이 표시된 제품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제품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뜻이 명확한 '유통기한'과 달리 '품질유지기한'이라는 용어는, 식약처 고시 '식품 등의 표시기준 2조 4-2'의 '식품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보존방법이나 기준에 따라 보관할 경우 해당식품 고유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는 기한'이라는 설명을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
유지되는 품질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한 것이다. 게다가 유통과정에서 제품에 표시된 보관방법 '직사광선을 피하여' 잘 보관이 되는지도 믿을 수 없다. 땡볕을 받으며 건물 밖에 쌓여있는 맥주병 박스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판매량이 많은 대형마트 등에서는 품질유지기한이 도래하기 전에 소비가 되거나, 자진 수거하여 품질유지기한이 경과된 맥주를 판매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소규모 슈퍼나 편의점 등에서는 이런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2012년까지 3년간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으로 장염·구토·복통·설사 등의 위해가 발생했다는 사례가 1068건이나 접수됐고 그 중 맥주가 30건 (2.8%)으로 8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맥주는 유통기한이 아니라 품질유지기한이기 때문에 판매자가 과태료 등의 행정처분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소비자가 이의를 제기한 부유물 등에 대한 검사결과도 '단백질, 폴리페놀, 당 등이 응고된 것으로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판정이 되기 때문에 배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반 식품만큼이나 부패, 변질에 따른 부작용이 자주 발생하는 맥주. 품질유지기한이라는 애매모호한 기준보다는 '유통기한' 표시로 강화해 식품안전관리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할 것이다.
조강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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